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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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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15.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11화.  관산성을 뒤흔든 무력

  “그대에게 기회를 주겠소. 며칠 쉬면서 무엇을 어찌 시작할지 생각해보시오.”

   다시 미루와 함께 대전에 들었을 때, 진흥왕은 가야궁의 배신에 떨며 흘리는 월광의 눈물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외로 돌리며 자못 깊은 음성으로 말했다. 월광은 대가야의 대전에선 중신들이 하나같이 진흥왕이 교활한 자라 규탄하였으나, 월광은 지금 그러한 평과는 전혀 다른 면모의, 자애로운 형님만 같은 진흥왕을 눈앞에 보면서 세상의 말들이 진실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폐하, 완승(完勝)이옵니다. 완승이옵니다.”

  노구(老軀)의 상대등이 대전으로 뛰어들어 허둥거리며 진흥왕께 고했다.

  “관산성 말씀이오? 관산성 싸움을 이겼소?”

  상대등은 늙은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한 채 바람에 흔들리는 꽃나무처럼 마구 흔들리며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무력 장군과 거칠부 장군의 공이 컸다 하옵니다. 무력이 성왕을 참수한 여세를 몰아 관산성에 들이닥치고, 

  거칠부 장군이 거센 군세로 백제와 가야, 왜의 연맹군을 휘몰아쳐 혼전(混戰)의 전황을 일거에 바꾸어놓았

  다 하옵니다.”

  진흥왕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부르짖듯 말했다.

  “내가 게 있어야 했다, 참으로 볼만 했겠구나. 그래, 무력. 무력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처음엔 백제의 태자 부

  여창에게 탐지와 우덕이 격파되어 어려운 싸움이 될 줄 알았더니 그걸 손바닥 뒤집듯 뒤집었구나. 거칠부 장

  군도 아직 늙지 않으셨구나. 기쁘도다! 참으로 장하도다! 전령은 들었느냐? 어서 전령을 들라 하라.”

  진흥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에 푸른 기를 꽂은 전령이 대전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무력과 거칠부라 해도 그렇지, 백제와 가야 연맹군, 왜병까지 삼만이 넘는다 하지 않았느냐?”

  전령이 두 손으로 이사부의 장계를 바쳤다. 상대등이 전령의 장계를 펼쳐 들고 먼저 혼자서 눈으로 읽고, 다시 입으로 고했다. 

  “무력 장군이 전장으로 뛰어들며 이미 베어 두었던 성왕의 머리를 흔들며, 백제왕의 수급이 내 손에 있다 외

  치며 짓쳐들자 연합군이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우왕좌왕 하였다합니다. 얼마 안 있어 다시 거칠부 장군도, 

  이사부 장군도 전장에 합류하여 창칼을 휘두르니 목이 떨어지는 것도 지옥귀 같은 비명 소리도 다만 적의 것

  이었다 합니다. 아군이나 적군이나 모두 온몸이 피투갑이 되어 엉겨 붙었으나,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것

  은 적군이었고, 적을 베는 것은 아군일 뿐이었다 하옵니다. 어느새 첫 전투에서 패했다던 탐지 장군과 우덕 

  장군도 병력을 가다듬어 적의 참살에 합세하니 적군은 모두 공포에 질려 무너질 뿐이었다 하옵니다. 마침내 

  적을 모두 척살하고 나자 관산성 계곡은 적의 피가 내를 이루어 흐를 지경이었답니다. 적이라면 말 한 마리

  조차 남김없이 처단하였으나…, 그러나 백제의 태자 부여창만은 놓쳤다하니 기쁜 중에 분할 따름이옵니다. 

  하지만 적들은 많아 봐야 살아 달아난 자 이천도 안 될 것이라 하옵니다.”

  상대등의 보고를 듣는 진흥왕은 기쁨에 겨워 몇 번이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디만 같은 보고를 듣고 있던 월광의 가슴은 두려움과 안타까움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관산성의 백제와 가야 연맹의 전멸 보고에 정신이 아득하여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때맞춰 진흥왕의 왕후 사도 부인을 위시하여 성골, 진골 귀족들이 대전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대전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통에 몹시 혼잡스러웠다. 월광은 미루를 눈짓으로 부르며 슬며시 대전을 물러 나왔다. 대전에서 물러 나와 처소를 향하는 길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갑자기 신열이 올랐다. 심복 미루가 월광의 안색에 놀라 왜 그러느냐 물었지만, 월광은 대답이 없었다. 월광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걸 미루가 겨우 받아 안아  부축할 수 있었다. 미루의 품에서 월광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월광 태자를 폐하소서.’

  ‘왕후마마를 서라벌로 송환하소서.’

  ‘불이야, 불. 항아전에 불이 났다!’

  “불을 꺼라, 불을 꺼야 한다!”

  아비규환 속을 헤매다가 월광이 잠을 깬 것은 늦은 밤이었다. 

  “태자마마, 나쁜 꿈을 꾸셨군요?”

  월광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미루야, 관산성에서 우리가 전멸했다는구나.”

  월광은 백제와 가야 연맹군을 우리라고 말했다. 미루도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가 월광에게 겨우 소식 하나를 전한다.

  “…곧 승리한 신라의 군병들이 서라벌로 개선한다는 소식입니다.”

  월광은 연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너울거리는 불빛에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관산성에서 목 베인 대가야의 영혼들이 월광의 어두운 방 안으로 몰려들어 울부짖는 모습인 것만 같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소리를 내어 울 수는 없었다. 이명(耳鳴)이 괴로워 두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지만 그래도 이명은 멈추지 않았다.

  “태자님, 눈물을 거두소서. 마음을 굳건히 하셔야 합니다.”

  미루가 떨리는 음성으로 월광을 위로했지만, 월광은 어깨를 들먹이며 소리 없는  흐느낌으로 밤을 지새웠다. 미루도 월광을 두고 홀로 밤새도록 자기 처소로 물러 나오지 못했다. 이튿날 오시(午時). 진흥왕이 월광을 불렀다. 진흥왕은 월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대가야의 태자를 벗고 참 신라 사람이 되어 보겠소?”

  어제와 달리 월광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흥왕은 그런 월광을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등에게 월광이 사탁부에서 기거할 수 있도록 바른 거처를 마련해 주고 월광의 모후가 신라의 진골이니 월광의 벼슬 또한 그에 걸맞도록 우선 급간에 두라 명을 내렸다. 월광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허리만 깊이 숙여 진흥왕에게 예를 표할 뿐이었다.  

   

  개선군이 당도하자 온 서라벌이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요란하고 혼잡스러웠다. 개선군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빛났으며, 군마 위의 장수들은 마음껏 거드름을 피웠다. 백성들은 군대의 행렬을 따르면서 목이 쉬도록 만세를 불러댔다. 월성 앞 너른 벌에 당도한 병사들은 행군을 멈추고 지휘관의 지휘에 따라 열을 맞추어 도열했다. 성루에 진흥왕이 모습을 드러내자 도열한 병사들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고 성벽을 무너뜨릴 듯 열광했다. 잠시 후 월성 성루에 진흥왕의 좌우로 장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검고 짙은 수염의 장수 하나가 성 아래를 향해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누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차츰 소란이 가라앉았다.

  “진흥 폐하, 만세!”

  성벽 위의 그 수염 장수가 두 손을 하늘로 번쩍 쳐들며 외쳤다. 그러자 성 아래 병사들이 거대한 무더기로 다 함께 그 선창을 받았다.

  “대왕 폐하 만세!”

  “대신국 만세!”

  이어지는 만세 소리는 백성들도 군인들과 함께 받았다.

  “대왕 폐하 만세!”

  “대신국 만세!”

  신라의 왕궁 월성(月城)의 오후는 만세를 연호하는 함성으로 오래도록 들끓었다. 성 아래 광장은 도열한 병사들과 그들보다 더 많은 수의, 그들을 둘러 싼 백성들로 가득 찼다. 광장 저 멀리서는 무얼 굽고 삶고 찌느라 김과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기븜과 환호에 들떠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이젠 좀 조용해지려나 할 때쯤 다시 또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만세 소리에 놀라 새떼들이 푸르르 달아나곤 했다.     


  이틀 뒤, 월광은 그 수염 장수가 이사부라는 것을 알았다. 진흥왕이 관산성 싸움의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월광은 또한 김무력을 처음 볼 수 있었다. 소문과 같이 그는 키가 크고 어깨가 다부졌고, 눈빛 또한 형형했다. 진흥왕에게는 과연 인물이 많았다. 거칠부는 노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관산성에서도 멀리 떨어진 성을 지키던 중이었음에도 관산성 전투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몸소 성문을 열고 달려갔다고 했다. 그가 바로 신라의 역사서 [국사]를 저술한 인물이 아닌가. 거칠부는 이렇듯 문무를 겸비한 장수였다. 진흥왕과 함께 승전 축하연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곳에서 월광은 우륵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의 연주를 듣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지만 익숙한 가야금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가야금 십이 곡? 가야의 곡이 신라의 연회에서 연주되다니….’

  우륵의 가야금 십이 곡 연주는 월광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가야금 십이 곡의 연주는 그러나 상가라도 가야성에서처럼 연주곡이 바뀔 때마다 춤꾼이 새로 나서곤 하진 않았다. 춤꾼이 없어도 우륵의 가야금 연주는 좌중을 휘어잡았다. 처음엔 계곡의 물소리인 듯 마음이 맑아지더니, 차츰 거칠어져 넘실거렸다. 가야금 연주는 어느새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듯하더니 들판에서 말을 달리듯 재재바르게 연주되었다. 사나운 풍우가 몰아치기도 하고 또 예리한 칼바람이 귓가를 에는 듯도 하였다. 종국에 이르러서는 홀로 고요한 숲속을 거니는 듯하더니, 마침내 숨을 멎을 듯, 잔잔하고 고요한 호면(湖面) 위로 한 장의 꽃잎이 나려 앉듯 위안을 주는 연주였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과 찬탄이 쏟아졌다. 우륵의 연주를 듣는 이라면 누구라도 우륵과 우륵의 가야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월광은 나이 든 우륵을 곁눈으로 보면서 찻잔을 들었다.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순배나 술잔이 돌고 나서 비로소 진흥왕이 관산성 싸움의 전모에 대해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모든 것이 진흥왕의 그림이었다는데 월광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왕이 진흥왕의 그림을 볼 줄 몰랐던 것이 패인(敗因)이었다. 간자(間者)였다. 모든 것이 진흥왕의 계책이었다. 백제 조정의 사정을 손바닥의 손금 보듯 진흥왕이 훤히 알고 있었던 것은 사비성에 진작 심어 둔 간자 덕분이었다. 간자는 미리부터 성왕의 내관이 되어있었다 했다. 백제뿐만 아니라 대가야에도 진흥왕과 소식이 닿는 자가 있었지만, 관산성 싸움에선 특히 백제 성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간자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했다. 간자는 시종 진흥왕과 김무력에게 성왕의 일거수일투족의 전갈을 전해 왔고, 성왕은 진흥왕의 간자를 충신 중의 충신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성왕이 병졸 50여 명만을 이끌고 급히 관산성으로 향하게 한 것도, 성왕이 달려가는 길목을 무력에게 알려준 이도 성왕의 내관이었다 했다. 진흥왕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손짓을 하자 궁에서 못 보던 한 내관이 다가와 진흥왕 앞에 서서 인사를 올렸다. 이어서 몸을 돌이켜 대신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좌중에서 그에게 박수와 칭송이 쏟아졌다. 진흥왕이 백제 궁에 들어 성왕의 내관이 된 간자가 이야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이번엔 무력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흥왕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무력은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바로 성왕의 목을 친 것은 무력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비장인 도도와 고간이었다는 것이다. 진흥왕이 무력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짐은 오늘 무력 장군이 참으로 자랑스럽소. 장군이 내 사람이라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소. 저토록 큰 전공

  을 부하에게 넘기는 장수가 또 어디 있겠소? 다른 장수들에게 진정한 장수의 표상이 되겠소. 무력 장군 정

  말 고맙소.” 

 무력이 군례를 올리자 좌중으로부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무력의 사실 고변은 도리어 그를 진실된 영웅으로 되살려 놓는 순간이었다. 관산성 전투의 모든 것이 밝혀지자, 이번엔 나이 든 거칠부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진흥왕을 향해 손을 모아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른 신하들과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진흥왕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폐하와 신국에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갑작스런 상황이었지만, 나이 든 거칠부의 새삼스런 충성 맹세에 신하들과 다른 장수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께 충성을 바치겠사옵니다.”

 진흥왕의 치밀한 전략을 모두 알게 된 장수들은 자만에 빠져 방자했던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했다. 자신들이 관산성에서 백제군과 가야 연맹군, 왜군을 물리치기 전에 이미 그들의 군왕이 이겨놓은 싸움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월광 역시 진흥왕의 치밀한 계책에 속으로 탄복하면서도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새삼 진흥왕의 간계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모든 것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진흥왕은 관산성 싸움의 공을 다시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되돌려 칭찬을 거듭했다. 잔이 다시 몇 순배 돌고 풍악이 다시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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