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월광태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해 한광일 Feb 17.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12화.  찬실의 찬탈

    

  “마마, 그예 찬실이 큰일을 벌였답니다.”

  미루가 침소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월광의 처소를 신도 벗지 않은 채 뛰어들었다.

  “뭐라고? 찬실이?”

  월광은 순간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찬실 왕자가 역적 거두란 놈과 함께 가야성의 이뇌 임금님을 해쳤다 하옵니다.”

  부들부들 몸과 목소리를 함께 떨며 미루가 거듭 고했다.

  “뭐라, 아바마마가 붕어하셨단 말이냐?”

  월광은 미루의 양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었지만 미루는 흐느껴 울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예, 그예…. 아바마마가 돌아가셨구나. 비명에 돌아가셨구나.”

  슬픔에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는 월광에게 미루가 모진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오라 왕후마마를 폐위하여 베옷을 입히고, 항아전에 유폐하여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시게 하고 있답니다.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처지시라서 역적의 

  병사들이 항아전을 사방 겹겹이 둘러서서 엄중히 지키며, 왕후마마께는 백성의 

  음식을 넣어드리고 있다 하옵니다.”

  모후가 위태롭다는 말에 월광이 또다시 허물어졌다. 

  “태자마마, 정신 차리소서. 정신을 차리소서.”

  미루는 실신한 월광을 마구 흔들어댔다.

  “어마마마까지…, 찬실, 내 이놈을 그냥 두지 않으리라.”

  갑자기 월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태자 검을 뽑아 들었으나 몸의 중심을 못 잡고 크게 휘청거렸다.

  “태자마마. 고정하소서. 여기는 서라벌이옵니다. 당장 뭘 어쩌시려고요?”

  미루가 월광을 뒤에서 껴안고 급히 태자 검을 빼앗았다. 미루에게 칼을 빼앗기고 월광은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날부터 월광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였다. 다만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찬실에 대한 원한이 되살아나는 듯 뿌드득 이를 갈곤 하였다. 진흥왕이 월성(月城)에서 궁인을 보내 월광을 불렀다. 그러나 월광은 쇠약해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미루가 궁인에게 월광이 건강을 잃었다 했으나 궁인은 다음날에도 다시 찾아왔다. 궁인은 이틀 뒤에 월광에게 꼭 궐에 들라는 진흥왕의 전갈을 내밀고 갔다. 마음이 급한 것은 미루였다. 미루는 미음을 끓이고 약초를 달이며 마음을 졸렸다.

  “태자마마. 일어나셔야 합니다. 진흥제께서 마마를 부르십니다.”

  미루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고, 월광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 고깃국 밥상을 들이거라. 내 진흥 임금을 만나야겠다.”   

  

  “태자의 뜻을 듣고 싶소. 아니 급간의 생각을 듣고 싶소.”

  “여쭈소서.”

  “그래, 급간은 뜻을 어찌 정했소?”

  월광이 무슨 뜻인지 몰라 진흥왕의 눈을 쳐다보다가 금세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소인을 추문촌으로 보내주소서.”

  추문촌은 옛 금관가야의 땅이었으나, 금관의 왕 구형이 아들들을 데리고 법흥왕에게 항복하면서 다른 곳과 함께 신라의 땅으로 편입된 곳이었다. 추문촌은 또한 강 건너 대가야의 땅 조문촌을 마주 보고 있는 땅이었다. 조문촌 역시 금관가야의 땅이었던 곳으로 강 건너에 있는 대가야의 지벌촌에 감싸 안긴 모양으로 경계를 맞댄 곳이었다. 말하자면 강 건너 대가야의 품속에 안겨진 한 조각 금관가야의 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문촌은 금관가야가 신라와 버거운 전쟁을 이어나갈 때, 위기의 금관가야를 형제로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강을 건너 금관가야와 한 운명으로 신라에 맞서야 할지도 모를 날을 위해, 선왕 가실 임금이 병력을 보내어 지키도록 한 이래로 지금까지도 대가야의 군이 주둔하고 있는 땅이었다. 금관가야는 신라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조문촌도 신라의 땅이 될 것이었으나 금관을 돕기 위해 금관의 땅 조문촌에 진을 치고 있던 대가야군은 어정쩡한 입장임에도 조문촌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대가야는 언젠가는 신라군이 금관의 옛땅을 찾으로 왔노라며 강을 건너오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엄청난 긴장감을 안고 있었지만,  끝내 법흥왕은 강을 건너오지 않았다. 가실왕 역시 두고 보자며 조문촌의 병력을 대가야 땅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가실왕은 대가야에게 조문촌이 형제인 금관가야의 땅이었던 때와 신라의 땅이 되었을 경우는 너무도 다른 것이라 했다. 조문촌에 신라군이 들어온다면 대가야가 곧 크나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가실 임금은 눈을 감으면서도 조문촌의 병력을 거두어들이지 않음으로 해서 이뇌왕 대에도 조문촌엔 대가야 병력이 주둔한 채였던 것이다. 그런 채로 이뇌왕은 서라벌의 양화공주를 왕후로 맞아들였다. 그런 채로 십칠 년이 지났다. 법흥왕이 까닭 없이 가야 누리를 괴롭히기 시작했을 때 이뇌왕은 조문촌으로 인해 마침내 대가야가 큰 곤욕을 치르게 될까 걱정이 작지 않았다. 법흥왕이 탁순과 녹기탄을 협박할 때, 결국 금관의 옛땅 조문촌의 종주권에 대해 물어오리라 긴장이 작지 않았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법흥은 탁순을 핍박하고 녹기탄을 병탄하면서도 끝내 조문촌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뇌왕은 그 까닭이 무척 궁금해서 몇 날을 두고 생각한 끝에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조문촌은 한 면은 강으로, 또 다른 면들은 대가야의 땅으로 포위된 협소한 땅. 법흥이 조문촌을 차지한들 지켜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강 건너의 신라병력을 들여와야 하고 혹시라도 갑자기 우리가 공격한다면 강과 우리의 땅으로 둘러싸여 견뎌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정말 법흥왕의 생각이 이뇌왕의 판단과 같았는지는 모르지만 끝내 법흥왕은 조문촌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진흥왕은 달랐다. 추문촌 현령에 일러 조문촌의 동향을 보고하게 하였으며, 가야성의 사변 이래로 대가야의 새로운 왕 찬실이 근래에 조문촌에 대가야의 병력을 보충하고, 새로 작은 성을 쌓은 일이며, 새로 지은 현청에 현령을 파견한 일 등에 대해 보고하게 하였다. 월광은 조문촌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흥왕으로부터 추문촌 현령의 보고 사항을 듣고 조문촌에 현청을 설치한 일이나 현청에 대가야의 현령을 파견한 일은 원래 금관가야의 땅이었던, 그래서 마땅히 신라의 땅이어야 할 조문촌에 대해 역적 찬실이 대가야의 땅으로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는 도발이라 강변했다. 조문촌의 일을 징죄(懲罪)코저하니 추문촌으로 자신을 보내 달라 청했다. 

  진흥왕이 빙긋 웃으며 월광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째서 추문촌이요?”

  월광이 진지한 눈빛으로 진흥왕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추문촌은 본시 금관가야의 땅으로서 법흥제 때 서라벌의 땅이 된 곳입니다. 그 추문촌이 강 건너 조문촌에 

   러 차례 침탈을 당하였다 들었사옵니다. 이치를 따지자면 조문촌 역시 서라벌의 땅인데 근래에 조문촌에 무

   례하게도 성을 쌓고 현청을 들였다 하지 않사옵니까? 그 현청의 현령이란 자가 가야궁의 반역자라는 보고

  가 있어 더욱 분기가 치솟았나이다. 하여 이제 본시 서라벌의 땅인 조문촌을 징벌하여 대왕의 은혜에 조금이

  라도 갚음을 할까 하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찬실은 소신이 끝내 용서할 수 없는 원수인 까닭입니다.”

  진흥왕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가 월광을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급간이 할 일을 찾게 되어 다행이오. 짐도 대가야에 참사(慘事)가 생겼다는 소식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월광은 진흥왕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흥왕이 옥좌에서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월광에게 다가왔다. 다가와서 월광의 두 손을 가만 부여잡았다.

  “부왕의 일은 참으로 안 되었소. 사탁부의 급간 월광. 그대는 지금부터 대신국    금관부 추문촌의 태수요.”

  월광이 다시 한번 허리를 깊이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소신 대가야를 멸하는데 미력을 다 하겠나이다.”

  진흥왕이 한 손을 월광의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내가 급간을, 아니 태자를 도우리다. 반드시 가야성의 역적 찬실을 멸하여, 대가야의 땅에 의를 바로 세우겠

  소.”

  “대왕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진흥왕은 허리를 숙인 월광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야 태자 월광기(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