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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18.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13화.  연화 공주를 만나는 월광

 “그건 그렇고…. 월광, 내 그대를 볼 때마다 깊은 슬픔에 젖어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소.”

  “…….”

  “슬픔이 오래 계속되면 몸을 상하는 법. 사람을 하나 만나보시겠소?”

  월광이 허리를 세우고 진흥왕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진흥왕이 월광에게서 몸을 등져 돌아서며 대답했다.

  “부탁이요. 이 서라벌에 그대를 간절히 만나 보길 원하는 여인이 있소.”

  월광이 진흥왕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신은 월왕(越王) 구천의 심정으로 와신상담 중이옵니다. 여인을 만나고 싶은 생

  각은 추호도 없나이다.”

  진흥왕이 월광을 향해 돌아서며 엄중한 목소리로 월광을 꾸짖었다.

  “사내란 그런 게 아니오. 그대를 보고 싶어 하는 여인의 마음을 그리 매몰차게 물리치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월광은 뜻을 굽히지 않으려 했다. 

  “서라벌에서 소신은 지금껏 여인을 가까이 한 적이 없습니다. 소신은…”

  그러나 진흥왕은 월광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내사사인은 급간 월광을 모셔라.”

   “…….”

  월광도 더는 묻지 않고 허리를 숙인 채 기다리고 섰다가 내사사인을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뜻과 다르다 해서 진흥왕의 명을 거스를 순 없었다.     


  두 개의 전각을 지나 계림지(桂林池) 위로 무지개를 걸어 놓은 듯한 석조 다리를 건넜다. 석조 다리를 건너자 한 걸음 폭마다 석계(石階)가 돌다리처럼 드문드문 놓였다. 석계는 계림지 건너편의 화려한 전각으로 이어졌다. 전각의 사방 벽은 들문으로 되어 있고, 사방의 들문이 모두 열려 있어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무시로 들려왔다. 가운데 놓은 커다란 탁자에는 금합과 주전자, 그리고 정갈한 다기가 간소하게 놓여 있었다. 찻잔 하나에 연록 빛의 차가 반쯤 담긴 채 놓여있는 것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있었던 것 같았다.

  “아, 저기 계시는군요. 잠시만 계시지요. 모셔오겠습니다.”

  내사사인이란 자는 월광을 홀로 전각 안에 남겨 둔 채 급히 전각의 왼편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여인이라니, 내 서늘한 가슴에 여인이라니 당치도 않지.’

  월광은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자책했다. 대가야를 잃고, 부왕을 잃고 마침내 모후마저 유폐된 처지였다. 자신이 구할 것이 있다면 이제 오로지 모후와 대가야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월광의 눈길은 자신도 모르게 내사사인을 따르고 있었다. 열린 들문으로 내사사인이 향하는 앞쪽에 자그마한 정자가 보였다. 한 여인이 정자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여인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 시녀인 듯한 여인 둘이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그 여인에게서 조금 비켜 서 있었다. 내사사인이 여인에게 고개 숙여 예를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 그는 여인과 더불어 이쪽으로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여인은 약간 고개를 숙인 채 뒤에서 조신하게 내사사인을 따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인이 점점 월광이 들어있는 전각으로 다가오자 월광은 자신의 의지와 달리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안 될 일이다.’

   월광은 마음을 누르려 여인이 들어오기 전 들문에서 떨어져 가운데 놓인 탁자의 의자를 끌어내어 홀로 앉았다. 두 사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월광은 짐짓 모른 체 하였다.

  “모셔왔습니다.”

   내사사인이 월광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며 고했다. 그의 뒤에서 여인이 월광에게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월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리로 앉으시오.”

  월광이 안내하는 대로 여인이 자리에 앉자 내사사인이 물러났다. 여인이 고개를 들어 월광을 바라보았다.

  “소녀, 대가야의 월광 태자님을 뵙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는 여인의 자태는 더욱 아름다웠다. 결혼하지 않은 여인네가 그러하듯 여인도 긴 머리를 틀어 올리지 않은 채였으나 머리에 꽂힌 장식만으로도 그녀가 귀한 신분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여인은 옅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이며 그녀도 월광의 인사를 기다렸다. 월광도 자리에 앉았다.

  “나를 아는 그대는 뉘시오?”

  “소녀, 연화라 하옵니다. 소녀 병이 깊어 오래도록 앓아누웠다가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일어났습니다. 소녀 기력을 회복한 뒤로 간간이 태자님의 소식을 들어 왔습니다. 태자님께선 소녀 몰래 소식을 거두어 들은 일로 노여워하실는지요?”

  병을 앓았다지만 여인은 얼굴이 남보다 흰빛인 것 빼고는 입술도 붉고, 피부에도 윤기가 흐르는 것이 대체로 건강해 보였다.

  “쯧쯧…. 어린 나이에 어찌 병을 앓았소?”

  월광은 저도 모르게 여인에게 측은지심을 보였다. 여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은 다 나았으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갑자기 월광은 여인에게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부처님의 가피는 또 무슨 말씀이요?”

  여인이 다시 미소를 띠며 입을 열려고 할 때 밖에서 한 무리의 궁녀들이 전각으로 들어왔다. 궁녀들은 각자 들고 온 것을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찻잔에 새로이 따스한 차를 따르고, 과자 상자를 열어 놓고, 접시를 펼쳐 놓은 뒤 다시 물러갔다. 

  “모후께서 부처님께 밤낮으로 기도를 올리시다가 어느 한 밤에 부처님께서‘여식의 병이 나으리라’말씀을 내려주신 뒤로 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옵니다. 그리하여 모후께서도 제 병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았다 하십니다.”

  그저 한 번 보기만 하리라 생각했던 월광은 어느새 여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별것 아닌 궁금증으로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모후라니요? 그럼…, 연화 아가씨라 하셨죠? 연화 아가씨도 공주님이시오?”

  여인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보도부인의 막내딸이옵니다.”

  월광은 깜짝 놀랐다.

  “보도부인이시라면…, 법흥제의 정비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허약하여 늙으신 모후께 많은 곤욕을 안겨드렸습니다.”

  월광은 법흥왕의 딸이란 말에 내심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눈앞의 이 여인이 대가야를 곤경에 빠뜨린 바로 그 임금의 딸이라니, 진흥제는 무슨 뜻으로 이 여인을 내게 만나게 하는 것일까? 월광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횡설수설 두서없는 말만 주워섬겼다.

  “법흥제께선 보령이 예순 서넛에 가까워 승하하셨는데 어찌 연화 공주님 같은 따님을 두셨소? 참으로 놀랍

  소.” 

  연화 공주는 월광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여 가만 혼자 웃었다.

  “태자님. 소녀 아바마마께서 대가야를 핍박하신 일로 태자님께서 많은 고초를 겪게 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

  니다. 소녀는 이렇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모후께서는 여전히 절집에 계십니다. 제 병을 낫게 해달라 기

  도하시던 모후께선 지금은 다시 아바마마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한 혼령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한 

  날 어마마마께서 제게 지금 대가야의 태자님이 서라벌에 와 계시다며 태자님의 소식을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법흥제는 대가야의 원수인데, 눈앞의 이 여인이 법흥제의 딸이라니, 이 여인을 어찌해야 하는 걸까? 눈앞의 원수의 여식을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월광은 더 앉아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린 들문가로 다가섰다. 숲 바람이 가슴팍에 들이치자 속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녀를 향해 돌아서긴 싫었다. 그녀를 미워하는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어마마마께선 지금의 태자님의 처지에 아바마마의 책임이 작지 않다시며 자주 한숨을 쉬곤 하신답니다.”

  “…….”

  “태자님을 이런 처지로 내몬 것이 아바마마의 책임이시라니….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만나 뵙고 이미 승하하신 아바마마를 대신하여 진실로 사죄드리고 싶었습니다.”

  “…….”

  “태자님. 아바마마를 용서하시고 부디 뜻을 강건히 하세요. 태자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연화 공주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월광은 자기도 모르게 연화 공주를 향해 돌아섰다. 연화 공주도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월광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밉게 보여야 할 연화 공주의 모습이 도리어 애잔하여 공주를 바라보는 월광의 마음도 공주가 밉기보다는 왠지 슬퍼지는 것만 같았다. 월광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 지금은 무어라 할 말이 없소. 하지만, 하지만…. 더러 이 전각에 차 한 잔 마시러 와도 좋겠소?”

  월광은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몰랐다.

 그냥 머릿속이 온통 복잡하고 혼란하여 아무렇게나 뱉은 말인지, 혹은 진정 연화 공주를 다시 한번 보고 싶은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언제든지 오세요. 소녀, 언제라도 여기서 태자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연화 공주의 인사를 뒤로 하고 월광은 서둘러 전각을 빠져나왔다. 벌써 날이 어두웠고, 미루는 행방을 한참 찾았노라며 투덜거렸다. 침상에 누워서도 월광은 연화 공주로 인해 쉬 잠이 들지 못했다. 잠을 깰 때도 월광은 꿈속에서 연화 공주를 보면서 깨어났다. 월광은 그런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신지요?”

  월광이 아침을 겸상을 하면서도 수저를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말이 없자 미루가 근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월광은 수저를 놓으며 고개를 들고 미루를 바라보았다.

  “연화 공주를 아느냐?”

  미루도 따라서 수저를 내려놓았다.

  “법흥제의 막내 공주님 말씀이십니까?”

  월광이 미루에게 몸을 기울여 다시 물었다.

  “뭐라? 네가 공주를 어찌 아느냐?” 

  미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대답했다.

  “병석에 누워 일어날 줄 모르는 막내 공주님 때문에 연로하신 보도부인께서 궁을 나와 절집에서 삼 년을 하

  루같이 기도를 올리셨다 합니다. 서라벌 백성 뿐만 아니라 가야 누리 백성들도 웬만한 자는 다 아는 소문입

  니다.” 

  “연화 공주를 뵈었다.”
   “건강하시더이까?”

   이번엔 미루가 얼굴을 월광에게 들이밀었다.

  “그래. 보도부인의 공덕이 대단한 것 같더구나.”

  “연화 공주님을 어찌….”

  “진흥제가 나를 보길 원하는 여인이 있다며 내사사인을 따르라 하더구나.”  

  월광은 망설이다가 미루에게 월궁 후원의 계림지를 지나 연화 공주를 만난 이야기를 세세히 들려주었다. 자신의 심복이 되어 오직 신뢰로써 자신을 대하는 미루에게는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심복에 대한 신뢰도 보여야 하리라. 이야기를 다 듣고도 미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월광도 말이 없었다. 미루가 먼저 침묵을 깨뜨리고 입을 열었다.

  “연화 공주님을 연모하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월광은 갑작스런 미루의 질문이 당황스럽기도 하였거니와 자기도 몰래 거짓말이라도 한 듯 낯이 붉어졌다.

  “연화 공주님이 미우십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월광은 미루의 이번 질문에도 당황스러웠다. 두 물음에 다 고개를 저었으나 사실 월광은 자신의 마음이 어떤 것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복잡하여 며칠이 지나도록 궁에 들지 않자 진흥왕이 월궁에서 사람을 보내 월광을 불러들였다.

  “추문촌은 큰 고을이요. 전권(全權)을 드리리다.”

  드디어 진흥왕은 월광에게 출병을 허락했다.

  “소신 미력을 다하겠습니다. 반드시 조문촌을 징죄하겠습니다.”

  “충분히 생각하시오. 무엇보다 병력을 잘 관리하여 강군을 기르고, 전략을 충분히 궁구하시길 당부하오.”

  진흥왕은 마치 문하를 가르치듯 자신의 생각을 월광에게 세세하게 이르고, 또 여러 가지 전술이 적혀 있는 서책을 내렸다. 월광은 진흥왕의 태도를 보며 새삼 조문촌 정벌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말을 어찌 생각하시오?”

  아직도 미심쩍은 듯 진흥왕은 월광에게 물었다.

  “손자로군요. 소신 적과 나 자신을 알기 위해 간자(間者)를 쓰고자 하옵니다.”

  비로소 월광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흥왕이 파안대소했다. 월광 또한 진흥왕의 웃음을 바라보며 자신의 그러한 생각에 더욱 자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연화를 보셨다고요?” 

  “예. 연화 공주님을 뵈었습니다.”

  “잘하셨소. 연화도 급간을 뵈었다며 기뻐했소이다.”

  월광은 고개를 들어 진흥왕을 쳐다보고 연화 공주를 뵌 까닭이 무엇인지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연화를 어찌 생각하오?”

  “예?”

  “급간의 상대로서 말이오?”

  “듣잡기 송구하옵니다. 어찌 감히….”

  “하하하. 되었소, 되었소.”

  “…….”

  “오늘 또 연화와 차를 한 잔 나누기로 하셨다고요? 게서 기다린답디다.”

  “예. 그것이….”

  월광은 표정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으나 진흥왕은 내내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퇴궐하시면서 연화를 보고 가시구려.”


  벌써 네 번째인가? 월광은 이제 대전에서 진흥제를 뵙고 나면 당연한 일인 듯 계림지를 건넜다. 오늘도 월광은 진흥제와 병법을 논하다가 대전을 물러 나왔다.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대전의 진흥왕 앞을 물러나와 월궁 뒤편의 계림지를 가로질렀다. 계림지를 돌아갈 수도 있었으나 월광은 늘 무지개처럼 걸려있는 돌다리를 건너는 게 좋았다. 석계로 이어진 길을 걸어 전각으로 접근하자 차향이 코 끝에 스쳤다. 열린 들문 안쪽으로 연화공주가 앉아 있다가 월광을 알아보고 일어서서 가만 고개를 숙였다. 시녀들이 알아차리고 전각 밖으로 달려나와 월광에게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또 와주셨군요.”

  연화 공주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아 월광을 맞아주었다. 그런 웃음을 받을 때마다 월광은 어두웠던 마음에 해가 드는 듯 가슴 속이 환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이 때문인가?’

  월광은 발걸음이 저절로 이리로 향하는 것이 어쩌면 공주의 이 웃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공주님의 환대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오히려 소녀가 기쁘옵니다.”

  연화 공주는 이제 월광을 맞을 때마다 손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런 까닭에 공주의 시녀들은 주위에서 물러나 있었다. 월광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런 연화 공주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차를 따르는 공주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공주의 아름다움은 그러나 보면 볼수록 애처로웠다. 오랫동안 앓은 까닭인지 공주의 옆얼굴이 조금 말라보였다. 애처로움은 그 때문일지 몰랐다. 월광은 연화 공주의 차가 좋았다. 가야궁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좋은 향이었다. 차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공주님. 지난번에 법흥제께서 제 처지에 책임이 있다 하셨는데 그 말씀 무슨 뜻 인지요?”

  월광은 결국 가슴에 묻어둔 채 열흘이 지나도록 곰삭이지 못한 궁금증에 대해 입을 열었다. 연화 공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선왕이신 아바마마께서 대가야에 왕후님을 신라로 돌려보내라 수차례 협박하셨다 들었습니다. 왕후님께서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며 거듭 편지를 내셨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가야궁 대신들의 주청에 결국 태자님께

  자리를 잃고 아라와 왜를 떠돌다가 마침내 이곳 서라벌에 이르셨다지요.”


  월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자신의 행적을 정확하게 꿰고 있는 것일까? 월광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불편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 풍경에 눈을 두었다.

  “태자님의 모후이신 이뇌 왕후님과 소녀의 모후께서는 지금도 서로 밀지(密旨)를 주고받고 계신 것을 모르

  셨는지요?. 이뇌 왕후님께서 서라벌에 계실 때부터 각별한 사이셨답니다.” 

  월광은 등 뒤로 연화공주의 목소리만 듣다가 연화 공주를 향해 다시 몸을 돌이켰다. 월광의 눈빛을 마주 보는 연화 공주의 눈망울이 자못 진지했다.

  “다시 한번 아바마마께서 대가야를 괴롭힌 일에 대하여 사죄드립니다.”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월광에게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연화 공주의 갑작스런 태도에 월광은 어쩔 줄을 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공주님의 잘못이 아니거늘 어찌 제게 고개를 숙이십니까?”

  “모름지기 부모는 자식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 자식을 대신하여 벌을 받고자 하는 일이 많으니 이는 부모

  의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소녀, 아바마마 대신 왕자님께 사죄드리는 것은 이제껏 당연한 일이라 여겨왔습

  니다.”

  월광은 연화 공주가 애틋했다. 연화 공주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공주님. 어서요.”

  월광이 거듭 권하자 공주는 다시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월광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찻잔을 들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차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도 찻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공주님, 다시는 제게 고개를 숙이지 마옵소서. 부탁이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태자님.”

  “다시는 제게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 약조하여 주시오.”

  “…, 태자님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월광이 탁자에 손을 얹으며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추문촌으로 갑니다.”

  공주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무슨 일로 떠나십니까? 소녀는 태자님을 오래 뵙고 싶습니다.”

  공주의 말에 월광은 저절로 공주의 눈을 마주 보았다. 오래 보고 싶다는 연화 공주의 말이 진심으로 고맙고 애틋했다. 공주에게 뭐라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그 또한 안타까웠다.

  “싸움터로 가시는군요. 왜 태자님께서…? 꼭 가셔야 한다면 언제 가십니까?”

  공주는 한꺼번에 여러 질문을 두서없이 월광에게 쏟아놓았다.

  “추문촌에서 향리와 양민이 모르는 손에 계속 암살되고 있답니다. 그리고 강 건너편은 조문촌이라는 곳인데 

  조문촌은 바로 대가야로 들어가는 가는 길입니다. 그곳은 바로 금관의 땅이었기도 하고요. 바로 그곳에 아바

  마마를 모살한 자가 ….”

  월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화 공주의 눈에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자 월광은 말을 잊지 못하고 당황하여 어찌해야 좋을 줄 몰랐다. 

  “공주님, 진정하십시오. 제가 무엇이라고….”

  그러나 연화 공주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젖어 있었다. 눈물 가득한 눈망울로 월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월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화 공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가만히 연화 공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여전히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공주를 내려다 볼뿐 이었다. 공주가 눈물이 가득 담긴 눈이 월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주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넘쳐흘렀다. 월광은 자기도 모르게 공주를 감싸 안았다. 공주의 자그마한 어깨가 월광의 품 안에서 떨렸다. 

  “공주님. 고정하시죠.”

  연화 공주는 마침내 월광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태자님, 꼭 가셔야 한다면 몸조심하세요. 무사하셔야 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태자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

  다.”

  공주의 어깨가 월광의 품에서 연신 들썩거렸다.     


  궁궐이란 항상 그런 곳이었던가. 항아궁이 그랬듯 서라벌의 월궁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번 소요는 진흥왕이 꿈에 황룡을 본 것이 계기였다. 궁궐을 짓던 터에서 황룡이 솟았으니 그 자리에 궐이 아닌 절을 지어야 하는가 하는 왕의 하문(下問) 때문이었다. 왕의 말 한마디에 신하들은 궁궐을 지어 왕실의 권위를 드높여야 한다는 패와 불교를 더욱 크게 일으켜 서라벌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패로 나뉘어 팽팽한 의견에 연일 대전이 소란스러웠다. 월광은 갑갑한 서라벌을 얼른 벗어나고 싶었으나 자꾸만 연화 공주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무겁기도 했다. 그런 나날 속에 출전의 날은 왔다. 처음 서라벌을 떠날 땐 심경이 복잡하였으나 막상 갑갑한 월성을 벗어나자, 묵은 체증이 뚫리듯 가슴이 시원했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껏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서라벌을 완전히 떠나긴 쉽지 않았는지 가슴 속엔 무언가 아슴한 것이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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