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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20.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14화.  추문촌 태수 월광

  추문촌에 몸을 풀자마자 월광은 이리저리 간자(間者)를 풀었다. 진흥왕에게서 배운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미루에게 일러 은밀히 이곳 저곳의 소문을 모았다. 낯선 고을의 정확한 형세를 파악하려면 항간의 소문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고 모아야 했다. 결국 전에 없이 추문촌에 살상 사건이 잦아진 것은, 강 건너 조문촌 현에 대가야의 현령이 새로 바뀐 뒤부터라는 것이 확인됐다. 월광은 다른 누구보다도 미루의 전언을 신뢰했다. 지금은 신라의 땅이 된 추문촌은 금관가야의 옛 땅으로 큰 고을이었으나 대가야가 차지하고 있는, 역시 금관가야의 옛땅 조문촌과는 작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월광은 며칠에 걸쳐 추문촌을 돌아보았다. 조문촌의 은밀한 살수(殺手)들이 벌써 몇 차례나 추문촌에 잠입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해치는 일이 있었다지만 추문촌의 방비는 여러 모로 허술했다. 경비를 늘리고 밤길을 엄중히 통제하라는 월광의 명에 미루의 손과 발이 전에 없이 바빴다. 월광은 이따금 강 건너의 조문촌을 손가림으로 바라보다가 어금니를 물곤 하였다.


  간자(間者) 하나가 조문촌 새 현령의 이름이 거두라는 정보를 전해왔다. 월광은 거두라는 이름을 듣고 치를 떨었다. 찬실과 함께 부왕을 도모한 자의 이름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조문촌을 바라보며 우울한 상념에 잠긴 월광에게 미루가 다가왔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추문촌으로 내려온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미루가 월광에게 청하였다.

  “다녀오다니, 여기 일이 이토록 바쁜데 어딜 다녀온단 말이냐?”

  미루가 뭔가 숨기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포기한 듯 표정을 풀며 입을 열었다.

  “아령 공주님을 뵙고자 합니다.”

  월광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령 고모님이라고? 고모님이 어디 계신단 말이냐?”

  “공주님의 배가 다시 바다를 건너와 아라의 높고개 포구에 들었는데, 백제와 가야 연맹, 왜가 한꺼번에 무너

  진 판에 공주님께선 가야 땅에 언제 또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하셨답니다. 그러니 제게 마

  지막으로 남기실 말씀이 있다시며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미루가 두루마리를 월광에게 넘겼다. 

  “고모님. 아령 고모님…. 내가 같이 가면 어떻겠느냐?”

  미루가 고개를 저었다.

  “태자마마. 마마께선 지금 이곳 추문촌의 태수님이십니다.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옵니다.”

  “그래, 그래. 안다, 알아. 네놈에게 물은 내가 잘못이지.”

  월광이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깊이 실망하자, 미루도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래, 며칠이나 걸리겠느냐?”

  월광은 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미루에게 물었다.

  “산길을 타야 하니 가고 오는데 닷새는 걸릴 듯합니다.”

  “그래, 네 처지가 부럽구나, 몸조심하여 다녀오너라.”

  비로소 미루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길을 나섰다. 미루가 떠나자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 모후가 그리웠다. 모후의 얼굴이 지워지고 다시 연화 공주가 그리웠다.     


  조문촌과 추문촌은 본시 금관가야의 땅이었다. 그러나 추문촌은 법흥왕 때 점령된 후로 줄곧 신라에 복속된 곳이다. 추문촌은 추문촌 만으로도 본시 큰 고을이었다. 그러하여 추문촌은 세 개의 현을 품고 있었으며, 따라서 현령도 셋이나 되었다. 월광은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태수였다. 처음엔 추문촌이 금관에서 신라로 넘어갔을지라도 추문촌과 조문촌은 금관가야 시절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추문촌과 조문촌은 작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까닭에, 추문촌 포구 쪽에 신라의 병사들이 초병이 되어 지키고 있을지언정, 두 지역 사람들은 모두 여전히 옛 금관가야의 사람들로서의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간에 적대감이란 없었다. 심지어 백제군와 가야 연맹, 왜의 연합군이 신라군과 관산성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때조차도 추문촌 백성들과 조문촌 백성들은 서로서로 강을 건너오고 건너가며 장시(場市)를 열고 물물교환을 벌이곤 했다. 두 고을의 관계가 험악해진 것은 관산성 전투가 끝나고 난 뒤부터였다. 


  대가야의 찬실이 궁궐에서 부왕 이뇌왕을 시살(弑殺)하고 왕위를 찬탈한 뒤, 대가야의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바뀌었고, 조문촌엔 새로운 수령이 파견되었다. 조문촌의 토성에는 금관가야의 요청으로 대가야의 군병들이 얼마쯤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금관가야의 추문촌을 지원하기 위한 대기 병력이었으나, 구해왕의 항복으로 그 목적이 상실되어 있었다. 바로 그 땅 조문촌에 대가야군은 여전히 주둔 중이었으나 구해왕의 항복을 받은 법흥왕이 주장한다면, 대가야는 그 땅을 대가야의 땅이라고 주장할 형편이 못 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법흥왕은 강 건너 쪽 조문촌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뇌왕은 법흥왕의 말이 없으니 어정쩡하게 조문촌에 병력을 눌러 앉혀놓곤 있었지만 언젠가는 큰 걱정거리가 될까 염려되어 법흥왕이 몹시 신경쓰였다. 하지만 실은 이뇌왕의 근심과는 달리 당시 법흥왕은 내내 강 건너 조문촌에 병력을 새로 배치할 만큼의 여력은 없었다. 게다가 법흥왕은 완벽하게 유리하지 않은 경우는 실행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조문촌은 그렇게 대가야와 신라의 어정쩡한 중간 지대쯤의 성격을 띤 채 대가야도 신라도 언급을 삼갔던 땅이었다.


  이뇌왕과 달리 찬실은 침착하기보다는 다혈질이었다. 궐내의 신하들에게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만 중히 여겨 앞뒤 모르고 자꾸만 서둘렀다. 대가야의 힘과 형편은 아랑곳없이 이뇌 왕후를 후궁에 유폐하고, 신라의 사신을 내쫓는 등 신라에 도발적 태도를 취하기 일쑤였다. 찬탈에 성공한 찬실은 즉시 조문촌에 현령을 파견하고, 병사들을 늘렸으며 토성 안에 서둘러 현청을 세웠다. 조문촌에 대가야의 현령이 파견 배치된 뒤부터 강 건너 이편 추문촌에 전에 없던 일들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조문촌에서 추문촌으로 넘어 온 상단(商團) 중에 불온한 무리들이 끼어 들어와 추문촌의 양인(良人)을 해치고 달아나는가 하면, 급기야 추문촌 이레현의 현장이 복면 자객들에게 암살될 뻔한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이레현의 일로 추문촌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때, 조문촌으로 나갔던 상단의 상인들이 조문촌 현령이 가야성의 찬탈자 찬실의 측근이라는 소문을 물고 왔다. 월광의 간자들은 나아가 조문촌 현령이 관산성 싸움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로 별기 암살조를 꾸렸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월광은 조문촌에서 추문촌으로 닿은 포구(浦口)를 폐쇄했다. 분기가 솟구쳤다. 그가 찬실을 두둔하는 자라면 부왕 이뇌왕의 암살에도 관여한 자일 것이다. 월광은 추문촌 사건을 샅샅이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강 건너 뿐만 아니라 몸을 돌려 종종 추문촌 안쪽도 살펴보았다. 옛 금관가야의 땅이 분열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했다. 가야 사람들에겐 금관가야든 대가야든 또한 아라가야든, 가야 누리는 모두 다 가야였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야인이었다. 부왕을 시살한 찬실을 어찌 도륙을 낼지 고민이 깊어 갔다. 울분도 덩달아 깊어졌다.     


  “태자마마, 미루이옵니다.”

  미루라는 말에 이마에 손을 얹고 고민 중이던 월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서 들어오너라. 그리고 그 마마 소리 좀 집어치거라. 난 이제 태수가 되었느니라.”

  “…….”

  미루를 가까이 앉히고, 월광이 미루의 무릎 가까이 바짝 다가앉았다.

  “아령 공주님께서….”

  “그래, 고모님께서 뭐라 하시더냐?”

  월광이 미루를 다그쳤지만 미루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리 어두운 게냐?”

  “공주님께선 태, 태수….”

  “그래, 태수라하라.”

  월광이 다그치자, 미루가 심호흡을 내쉬었다.

  “공주님께선 태수님이 함께 가셨으면 하십니다.”

  “그게 웬 말이냐, 어디로?

  미루의 엉뚱한 보고에 월광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바다 건너 왜로 가자 하시옵니다. 그리고 또…, 대가야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고?”

  월광의 채근과 관계없이 미루의 대답은 두서가 없었다.

  “공주님께선 찬, 찬, 찬….”

  “찬실이 그놈이 그래. 말해 보거라”

  “찬실이 대가야의 운명을 재촉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그래. 어서 말하라.”

  “공주님께선 대가야는 지금 지난 관산성 전투 패전으로 마을마다 곡소리가 넘치고, 장졸들이 돌아오지 않아 피폐할 대로 피폐해 늙은이와 여인네의 손으로 짓는 농사가 씨앗도 못 건질 정도라 하옵니다. 대가야뿐만 아니라 아라에서도 농사는커녕 배 띄울 손과 무거운 짐을 질 등조차 모자라고, 더욱이 나라를 지켜 낼 손은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 되어 이미 나라꼴도 허물어졌다 한탄하셨습니다.”

  월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산성에서 백제군뿐만 아니라 가야 연맹군과 왜의 군병들도 거의 다 몰살했다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공주님께서 태수님의 추문촌과 머리를 잇댄 조문촌에 새로 부임한 현령은 거두라는 자로 전부

  터 임의로 별기 암살조를 꾸려, 찬실을 반대하는 인물을 밀살(密殺)하고 있으니 주의하시라, 꼭 전하라 하셨

  습니다.”

  “거두라더냐?”

  조문촌의 새 현령이란 자의 이름을 거듭 확인한 월광은 아령 공주에게 새삼 놀랐다. 아령 공주는 저 멀리서도 그런 정보를 어떻게 모으는 것일까? 조문촌의 새 현령은 불과 두 달 전에 부임해 온 바였다. 월광은 코앞의 적에 대해 자신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아령 공주가 참으로 대단하다 여겨졌다.

  “조문촌 현령은 찬실의 외가 놈으로 성정이 포악한데다가 거침이 없어 사람들의 원성이 높은데, 그가 곧 찬

  실을 도와 이뇌 임금님을 해한 흉한(兇漢)이라 합니다.”

  “거두라했겠다?”

  월광은 비로소 머릿속이 환해졌다. 그러니까 조문촌의 새 현령이라는 인물은 찬실의 장조카 거두란 자가 틀림없을 터였다. 

  “바로 엊그제 아라가야의 대신 우달이 별기 암살조에 희생되었다 하옵니다.”

  “아니, 우달 대신이라면 나의 둘째 고모님이신 다령 고모님의 부군이 아니시더냐?”

  “그러하옵니다.”

  “이놈이 어찌 아라가야의 고모부님한테까지 마수를 뻗친단 말이냐? 다령 고모님께선 원한에 사무쳐 마음 밭

  이 다 꺼져내렸겠구나!”

  “우달님께서 찬실을 가장 반대해 오신 분이셨다 하옵니다.”

  월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우달 대신께서는 가야성에서도 대노하여 찬실을 꾸짖으신데다가 아라가야에 돌아오셔서도 입만 열면 찬실을 역적놈이라 질타하셨다 하옵니다.”

  “거두, 찬실. 이놈들이 하늘 무서운 줄도 모르는, 참으로 흉악하고 살벌한 야차 같은 놈들이로구나.”

  “공주님은 어제 이곳 추문촌 이레현의 현장이 별기 암살조에 걸렸다는 소식도 알고 계셨습니다. 다행히 비수

  가 비꼈다지요? 공주님께선 이미 삼한 제일국이 된 신라를 업신여기고 저리 망동을 하니 찬실은 패망을 재

  촉하는 결과를 가져오리라 하셨습니다.”

  실제로 진흥왕은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마운령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래, 내 이놈 거두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지 않겠노라. 너는 내일부터 추문촌 세 고을의 현령들을 당청으

  로 모이라 이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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