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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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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21.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15화.  월광과 무력

  월광이 이른 대로 각 현의 현령들은 그들의 아래 위계인 현장들을 거느리고, 또 현장들은 백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추문촌 당청에 도착했다. 당청은 갑작스레 몰려든 병사들로 웅성거렸다. 게다가 당청의 병사 사백이 함께하니 칠백이 넘는 병력이 꾸려졌다. 그러나 칠백 병력은 조문촌을 압도하기엔 여전히 넉넉한 병력은 아니었다. 월광은 다시 각 현리에 자원 정벌군을 모집하는 격문을 붙이게 했다. 격문이 나붙고, 곧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훈련이 시작된 지 닷새가 지나도록 병사들의 사기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이들의 훈련을 맡은 미루의 목소리만 날이 갈수록 갈라져 쇳소리를 냈다. 월광이 미루의 말을 듣고 무릎을‘탁’쳤다. 추문촌도 조문촌도 원래 금관가야의 백성이었으니 같은 겨레를 죽이는 훈련이 썩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을 돌려야 한다. 월광은 당장 훈련을 멈추고 병사들 앞에 나섰다.

  “조문촌은 원래 우리 추문촌과 한 겨레였다. 우리의 형제였다. 이를 기억하라. 우리의 훈련은 조문촌 백성들

  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조문촌의 불의(不義)를 씻어내려는 것이다. 지금 조문촌은 대가야의 불의로 가득 

  차 있다. 그 불의의 중심은 바로 거두! 거두가 누군지 아느냐? 거두 이 자는 가야궁의 차자 찬실과 함께 저 

  대가야 상가라도의 이뇌 임금을 시살한 자다. 그의 주인 찬실은 그렇게 자기 아비 이뇌 임금을 죽인 뒤 마음

  대로 왕위에 올라 대가야의 왕 행세를 하고 있는 천하의 호로 자식이다. 강 건너 저 조문촌 현청에는 바로 

  그 호로 자식의 짝패인 거두란 놈이 들어있다. 너희들은 우리 추문촌의 현리 두 명과 백성 여섯이 살해된 것

  을 아는가? 바로 저 거두 놈의 짓이었다. 우리의 지척에 저 불의의 야차 같은 거두 놈이 함께 있어도 되겠는

  가? 그래서 나는 지금의 저 조문촌을 불의 땅이라 하는 것이다. 저 가야궁의 더러운 찬실 놈과 더불어 이뇌 

  임금을 시살하고, 또 우리 추문촌에 살수(殺手)를 잠입시켜 우리 백성의 목숨을 함부로 해한 저자를, 나는 

  그냥 둘 수가 없다. 나와 함께 강 건너 저편의 역적 놈, 거두를 치지 않겠는가? 조문촌에서 저들을 몰아내고, 

  조문촌을 정토(淨土)로 만드는 일에 동참하지 않겠는가?”

  월광의 역설(力說)은 과연 병사들의 마음을 다잡는데 효과가 있었다. 병사들의 눈에 분기가 고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본시 금관가야의  백성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대가야를 다른 나라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신라의 백성이 된 지금은 그러한 생각이 퇴색된 바 없지 않으나 그들의 마음속엔 여전히 대가야는 곧 금관가야이기도 한 것이었다. 조국 금관을 잃고 신라의 백성이 된 뒤에 대가야의 이뇌왕이 역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도 무슨 상관이랴 했던 일이 비로소 부끄러운 일임을 깨우쳤다. 게다가 조문촌 현령의 은밀한 살수들에 해를 당한 추문촌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들은 조문촌 현령에 대한 두려움을 원한과 복수심으로 바꾸지 못하고 있었으나 월광의 연설에 마음이 결기가 들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 다시 또 희생되지 않기 위해 애초에 그 뿌리를 도려내자는 월광의 높은 목소리에 군병들은 한 목소리의 모두 함성으로 화답했다. 

  ‘사기만으론 안 된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월광은 사기와 함께 진짜 실력이랄 수 있는 자신감을 높이려면 고된 훈련을 이겨내어 강군이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몸소 날마다 병사들과 함께 고된 훈련에 참가했다. 훈련이 거듭될수록 병사들의 사기도 자신감도 날로 높아갔다. 


  “미루는 이 길로 월성에 가서 내 뜻을 진흥제께 전하라.”

  월광은 미루를 통해 조문촌 토벌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월광에게도 걱정은 하나 있었다. 좀처럼 지원군의 수효가 늘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격문을 붙였다. 격문엔 대가야의 조문촌 현령 거두의 불의와 횡포를 나열한 뒤, 의를 일으켜 조문촌을 치죄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추문촌민들은 조문촌을 적으로 여기기 어려웠는지 격문의 효과는 생각보다 미미했다. 서라벌에서 미루가 진흥왕의 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뜻밖에도 진흥왕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전언이었다.

 ‘사기를 높이려 군왕이 이 궁벽지고 작은 추문촌에 직접 행차한다니….’

  월광은 진흥왕의 그릇에 다시 한번 탄복했다. 

  “태수님, 갑자기 정벌군을 지원하는 백성들의 수가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그도 그렇지만 진흥제는 과연 대단한 인물이 아니냐?”

   진흥왕이 직접 내려온다는 소식이 항간에 퍼지기 시작하자 백성들은 너도나도 정벌군에 지원하고자 몰려들었다. 백성들은 진흥왕이라면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흥왕은 지금까지 백제와의 싸움에서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패한 적이 없는 승자였다. 단 한 차례도 패한 적 없는 승승장구의 왕이었다. 월광은 진흥왕의 절벽과 같은 힘과 진흥왕을 향한 백성들의 두터운 신망이 부럽기도 두렵기도 했다. 월광은 다시 지원병들 앞으로 나섰다.

  “나는 오늘 추문촌 고을의 의로움을 알았소. 저 강 건너 조문촌 현령 거두라는 자는 대가야의 이뇌왕을 시살

  하여 찬실의 오른 팔이 된 뒤로, 목숨을 함부로 해치고, 백성의 것을 함부로 빼앗는 못된 짓을 일삼는 자요.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 밀살(密殺)을 일삼는 자요. 나는 이제 의를 세워 조문촌을 정벌하기로 했소. 나와 함

  께 모진 훈련을 이겨낸 장한 장병들이여, 나와 뜻을 함께하겠는가?”

  월광의 물음에 장병들의 함성이 추문촌 관아를 뒤흔들었다. 월광은 어느새 장수

적 풍모에 웅변가의 면모 또한 갖추고 있었다.


  월광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한동안 상념에 잠겼다가 조용히 태자검을 집어 들었다.

 ‘스르릉’

  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칼집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두 손으로 칼자루를 힘껏 쥐고 눈에 뵈지 않는 찬실을 겨누었다. 칼끝이 부르르 떨렸다. 

  ‘내 기어코 대가야로 가리라. 부정해진 저 상가라도의 가야성을 말끔히 씻고자 내 다시 돌아가리라.’

  칼끝을 내리며 월광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야궁 대전 뒤편 항아전에 유폐되어 찬실에게 수모와 고초를 겪고 계실 모후가 그립고 안타까웠다.     


  “태수님, 태수님.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미루가 문 앞에서 급히 아뢰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냐?”

  문을 열어젖히자,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미루의 이마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진흥제께서 벌써 시오리 밖까지 이르렀습니다.”

  월광은 그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 벌써 예까지 오셨단 말이냐?”

  월광이 말을 급히 몰아 추문벌로 나아갔다. 미루가 백여 병사를 수습하여 뒤따랐다. 추문벌 저 끝에서 먼지 구름이 뿌옇게 일었다. 대군이었다. 

  ‘무슨 일로 저리 대군을 일으켰을까?’ 

  월광은 먼지 구름을 향하여 달리면서도 진흥왕의 속내가 궁금했다. 오천 병력 쯤은 되어 보였다. 월광은 진흥왕의 마차 오십여 보 앞쯤에서 말고삐를 미루에게 넘기고, 뜀걸음으로 홀로 내달았다. 

  “신 추문촌 태수 월광, 대왕 폐하를 뵙습니다.”

  진흥왕은 마차에서 내려 월광의 손을 잡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 무력도 추문촌 월광 태수님을 뵈옵니다.”

  낯선 목소리에 월광이 고개를 돌렸다. 관산성 전투의 그 무력이었다. 월광은 무력의 모습을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장군께서 어인 일로?”

  그러나 무력은 월광에게 웃을 뿐이었다. 그들 사이로 진흥왕이 끼어들었다. 

  “하하하, 못 본 사이에 월광 태수의 얼굴도 제법 많이 그을렀소.”

  진흥왕의 얼굴에 진심으로 월광을 반기는 웃음이 피어올랐다. 

  “황공하옵니다.”

  “그래, 태수 노릇은 할만하오이까?”

  “소신, 미력을 다하고 있나이다.”

  “그래, 그래. 어서 갑시다. 내 추문촌의 당청을 어서 보고 싶소이다.”

  “그러시지요. 그런데….”

  “음, 내 당청에서 말하려 했거늘…. 궁금증을 못 참으시는구려.”

  “…….”

  “어찌 이리 많은 군사를 이끌고 왔느냐는 말씀이시겠지요?”

  “….그뿐만이 아니오라…, 당청으로 모시겠나이다.”

   밤이 깊고 달이 밝았다. 진흥왕이 잔을 권하며 월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문촌 현령이 분명 거두라는 자라지요?”

  “그러하옵니다.”

  진흥왕이 잔을 들어 마신 후 다시 물었다.

  “그자가 그리 무도한 자요?”

  “역적 찬실을 부추겨 역모를 주도한 자이옵니다. 게다가….”

  “게다가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또 별기 암살조를 꾸려 애꿎은 목숨을 해치고?”

  “그렇사옵니다.”

  진흥왕이 다시 잔을 들이켰다.

  “태자의 의로운 칼로써 첫 번째로 멸해야 할 자로고.”

  “대왕 폐하, 신 추문촌 태수 월광 듣잡기 송구하기만 하옵니다.”

  진흥왕이 자신을 태수라 했다가 태자라 불렀다가 하는 것이 월광은 몹시도 불안하였다.

  “괜찮소. 그대는 신라 땅 추문촌의 태수이지만 대가야에서는 응당 태자인 것

  을….”

  “폐하, 황망하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월광은 진흥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하하하, 괜찮다고 하지 않았소?”

  진흥왕의 흡족한 얼굴에 술기운과 함께 미소가 잔잔히 번졌다.

  “내 어찌 태자의 정벌을 보고만 있겠소? 내 태자의 힘이 되어 드리기로 했소.”

  진흥왕의 자상한 말에 월광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의 꿈은 우리 신국을 삼한 제일의 강국으로 만드는 것이요. 내겐 삼한 제일의 강병이 있기 때문이요. 월광

   태수께서 이번 조문촌 정벌에 신라군의 위용을 맡아보시오. 병 삼천은 무력에게, 병 이천은 그대에게 맡기
  리다. 이미 태수께서는 추문촌에 일천에 가까운 강병을 거느리고 있으니 그래야 무력에게 공평할 것이요. 그

  리고 난 그대들의 승전보를 기다리며 예서 기다리고 있겠소.”

  거두도 언젠가 월광이 강을 건너오리란 걸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쯤이 될 것인가는 순전히 월광의 결정에 달려있는 문제였다.      


   월광은 새벽을 택했다. 말을 달려 강 상류의 작은 개울을 그대로 건너며 조문촌 측면으로 함성을 울렸다. 불화살이 날자 삽시에 조문촌의 초소에 불이 올랐다. 기병 일천에 보병 오천이 절반씩 월광과 무력의 뒤를 따라 조문촌을 두 갈래로 들이치자 놀란 조문촌의 병사들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짚단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적은 수의 매복군이 대군에 놀랐는지 매복지를 벗어나 혼비백산 골짜기 위쪽으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작은 골짜기를 넘자 조문촌 고을의 너른 벌이 펼쳐져 있고, 뜻밖에 대가야 병사들이 진을 친 채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월광은 돌격 속도 그대로 병사들을 적진으로 몰아붙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대가야군의 병력은 신라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방자진을 펼치고 있던 대가야군 진영의 한가운데로 월광의 신라군이 산사태의 돌무더기와 토사처럼 덮쳐들었다. 이어서 대가야군의 왼쪽으로 무력이 깊숙이 들이쳤다. 대가야군 진영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이 쏟아지고 피가 사방에서 튀었다. 대가야군 진영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걷잡을 수 없이 와해되는 대가야군 진영의 병졸들이 뒷걸음질을 치며 놀란 새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말릴 수 없이 기세가 오른 월광의 군사들이 달아나는 대가야 군을 숲까지 기어이 쫓아가 척살하는 것을 보고 월광의 눈에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아, 나의 백성들아. 나의 백성들아.’

  홀로 속울음을 울던 월광이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산으로 달아나는 병졸들을 해치지 마라. 조문촌으로 달아나는 병졸들을 쫓아라. 저들을 길잡이 삼아 조문촌

   현청으로 가자. 가서 거두를 잡자.”

  숲으로 산으로 달아나는 조문촌 병졸들을 쫓다 말고 신라군들이 방향을 돌이켜 

월광의 뒤를 다시 따르기 시작했다. 조문촌을 향해 달리는 월광 군의 대오가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달아나는 적을 쫓으며 벌판을 가로지르자 곧바로 성 밖의 마을들이 듬성듬성 펼쳐졌다. 길이 마을을 가로질렀으므로 병사들도 마을 길을 가로질렀다. 신라군을 본 백성들이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난리법석을 떨며 혼비백산 뿔뿔이 달아났다. 다시 월광이 목소리를 높였다.

  “백성들을 건드리지 말라, 민가에 들지 말라, 명을 어기는 자 목이 달아날 것이다. 백성들을 건드리지 말라.”
   길을 따라 월광 군이 한나절을 진군하여 조문촌의 현청이 든 성곽 밖에 당도했을 때, 무력군은 벌써 성곽을 포위하고 있었다. 조문촌은 작은 현이었지만 조문 현을 담느라 급히 토성을 보완하여 이룬 새 성도 높은 성은 아니었다. 무력 군에 월광 군이 합세하자 군세가 자못 당당했다. 조문촌에서 육천의 병력은 처음 보는 대군이었다. 무력 군들에 합세하여 월광 군이 다시 성 외곽을 에워싸니 성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성안으로 항복을 권하는 화살을 쏘았지만 성안으로부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무력이 화공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월광은 생각이 달랐다. 화공을 하면 희생이 너무 클 것이고, 사상자의 대부분은 백성들일 것이었으므로 월광은 무력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았다. 

  “화공이 아니더라도 이미 결과는 뻔한 터에 무엇 때문에 화공을 하겠소?”

  그러나 무력 또한 단호했다. 

  “시간을 절약하고 적에게 우리의 무자비함을 보여야 합니다. 화공은 또한 저들    에게 공포를 전염시켜 우리에게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할 것이요.”

  월광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적이라 해도 조금 죽이고 이기면 신라의 백성이 느는 것이요. 이것이 이 전쟁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소?” 

 무력은 월광과 생각이 달랐지만 더 주장하지는 않았다. 월광이 눈빛에서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 같은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뜻을 월광이 맞춰줄 것을 바라는 대신, 충차를 다그쳐 성문을 깨뜨리고 성안으로 들어가자 했다. 결국 충차를 여러 번 맞은 성문이 깨지고 신라군이 성안의 현청으로 급물살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칼과 칼이 부딪치고 많은 목숨들이 달아났다. 신라의 모든 장수와 군사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무력이었다. 무력이 성문 안으로 뛰어들며 칼을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햇살이 튕그러졌고 이어 대가야 병사들의 목이 떨어졌다. 그의 뒤를 황톳물처럼 신라군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월광의 병사들마저 현청 안마당으로 들어서자 현청은 미어터질 지경이 되었다. 조문촌 현청 구석구석에서 대가야의 병졸들과 낮은 벼슬아치들이 신라 병사들에게 마구잡이로 끌려 나왔다. 월광의 명대로 신라군은 성안의 백성들에겐 위해를 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나와 현청 너른 마당에 무릎을 꿇고 손을 머리 뒤로 올려붙이며 항복을 해왔다. 월광은 병사들과 함께 성과 현청을 구석구석 뒤져 거두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끝내 월광은 거두를 찾아내지 못했다. 월광이 묻자 포로 중 하나가 상가라도로 지원군을 청한다며 신라군이 닿기도 전에 한 떼의 군마가 성문을 빠져나갔다 했다. 현청이 대강 정리되는 광경을 보며 월광과 무력이 현청 마루에 거의 동시에 걸터앉았다. 무력과 월광은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력의 몸체는 확실히 남달랐다. 어깨가 두껍고 몸피도 남보다 크고 다부져보였다. 그렇지만 무력의 표정엔 어렴풋한 슬픔 같은 것이 깃들어 있는 듯 보였다. 잠시 둘은 서로 말이 없었다. 월광은 처음엔 그런 무력에게 측은지심이 일었다. 패망한 금관국의 셋째 왕자였던 무력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동병상련이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널브러진 대가야의 병졸들이 수레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마구잡이로 실려 나가는 것을 보자 도리어 그에게 분노가 일었다. 조금 전 조문촌 성문을 깨뜨리고 성안으로 들이치던 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관산성에서 가야의 병졸들을 어떻게 짓이겨 놓았을지 충분히 상상되었다. 무력에게 처음 말을 건넨다는 것이 인사는 고사하고 쌀쌀맞은 질책이었다. 

  “이미 이긴 싸움에 그같이 사나울 게 뭐 있었소? 저 아까운 목숨들을 보시오.”

  무력이 투구를 벗어 마루에 놓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월광을 바라보았다. 그런 무력을 월광이 꿈틀거리는 눈썹으로 노려보았다. 무력도 월광의 눈빛을 마주 받았다. 그러더니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태수님의 태수는 어느 나라의 벼슬이요?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신라의 신하가 되었소. 신라에 충성하는 것

  이 곧 내 백성을 잘 지키는 것이란 내 생각   엔 변함이 없소. 지금 신라가 강성한 까닭은 신라군 모두가 용장

  과 강병들이기  때문이오. 신라의 용장들은 다 진흥제의 화랑에서 나오고 있소. 화랑이 된 청년들은 자부심

  과 책임감이 대단하여 백성들과 신하들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소. 그래서 신라의 사내들이란 사내들은 다 화

  랑이 되고자 하고 있소. 화랑은 강하니 내가 그들보다 더 강해야 내 백성들을 지킬 수 있단 말이요.”

  “백성들을 지킨다, 그대가 금관의 백성들을 지킨다고요?”

  월광은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무력은 월광의 조소에 잠시 정색을 하고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내가 강하면 신라는 금관의 백성을 건드리지 않소. 그러나 내가 미약하면 금관의 백성들은 신라의 백성들에

  게조차 핍박을 받을 것이요.”

  “…….”

  이 무슨 궤변인가? 월광은 무력의 논리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월광을 바라보다가 무력도 말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금관의 싸울아비요. 결코 신라의 화랑이 되진 않을 것이오. 또한 결코 저들보다 나약하지 않을 것이오. 

  나는 이사부도 넘고 거칠부도 넘을 것이오. 오직 그것이 내가 이 신라 땅에서 내 백성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이요.”

  “…….”

  월광은 무력의 말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런 월광을 두고 무력은 성큼성큼 두어 걸음을 내딛다가 다시 멈춰 섰다. 그리고 몸을 돌이켜 월광에게 물었다.

 “내가 오늘 벤 병졸들은 대가야의 병졸이 아니라 반역자 찬실의 병졸이 아니었던   가요? 그리고 태수님은…,

  대가야의 백성들을 차후에 어찌 지키시겠소?”

  월광에게 질문을 남겨 둔 채 무력은 큰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무력은 병사들에게 조문촌의 항복 병졸들을 앞세워 조문촌의 향촌을 돌며 향리들을 잡아오라 명했다. 늦은 저녁 조문촌의 향리들이 당청에 끌려와 무력에게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월광은 무력의 하는 양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월광과 무력은 병력의 일부를 거두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추문촌으로 향했으나 서로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무력과 월광에 앞서 승전보는 이미 진흥왕에게 전해져 있었다. 진흥왕이 추문촌 현청 밖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소장들 폐하를 뵙습니다.”

  월광과 무력이 말에서 내려 예를 올리자 진흥왕이 양손으로 둘의 어깨를 두드리며 크게 기뻐했다.

  “내 이미 두 장군이 잘 해내리라 믿었소. 과연 두 분은 훌륭한 내 장수들이시오.”

  “과찬이십니다. 작은 승리일 뿐입니다.”

  무력이 진흥왕에게 겸손을 보이자 월광도 진흥왕에게 허리를 굽혀 겸양을 표했다. 진흥왕이 현청으로 들자 월광과 무력이 뒤따랐다. 

  “대가야군의 수급 일천 칠백을 베었다고요?”

  진흥왕이 월광과 무력을 치하할 때마다 월광은 남몰래 가슴이 에일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자신이 이끈 신라군이 벤 것은 바로 대가야의 병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진흥왕은 그런 월광에게 직접 잔을 따르고 있었다. 먼저 잔을 비운 무력은 곁눈으로 월광을 흘끗 넘겨보고 있었다.      


  진흥왕은 조문촌에 주둔한 병사들과 약간의 장수들을 남겨 두고 월광과 무력을 데리고 서라벌로 개선하였다. 월궁에서 여러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조문촌 정벌의 공으로 무력과 월광은 각각 한 등급씩 지위가 승차되었다. 월광의 등급은 이제 사척간이며, 벼슬은 추문촌 태수에서 대등이 되었다. 조문촌이 정벌된 뒤에 대가야는 크게 위축되었다. 무력은 다시 명을 받고 사방군주의 하나인 감문군주의 직책으로 돌아갔으나, 진흥왕은 이미 공이 큰 무력에게 다시 그에게 조문촌을 식읍(食邑)으로 더해 주었다.


  서라벌에 다시 온 지 닷새가 지난 뒤에야 월광은 대전을 나와 계림지의 무지개 석교(石橋)를 건넜다. 성큼성큼 흙에 박힌 돌다리를 건넜다. 어떻게 알았는지 전각 앞에 공주와 시녀들이 미리 나와 있었다.

  “태자님, 뵙고 싶었습니다.”

   공주는 돌다리길을 건너온 월광의 품에 와락 안겼다. 얼떨결에 월광도 연화 공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공주 뒤에 도열해 있던 시녀들이 급히 돌아섰다. 

  “공주님, 강건히 잘 지내셨습니까?”

  연화 공주는 눈물 고인 눈망울로 대답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월광은 두 팔에 힘을 주어 연화 공주를 꼭 껴안았다. 

  “공주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월광이 공주의 작은 어깨를 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이자 연화 공주의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공주가 다시 월광의 품에 안겨들었다. 

  “태자님이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월광에게 안긴 채 공주가 속삭였다. 

  “나 역시 공주님이 또 아프지나 않을까 걱정이었소.”

  여전히 공주는 월광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마마마 옆에서 태자님의 무사귀환을 기도했습니다.”

  “공주님의 기도 덕분으로 나는 무사했소이다.”

  전각에 들며 공주는 시녀들에게 차와 간소한 음식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공주는 월광과 마주 앉아 월광이 서라벌에 없었던 동안 언제 모후가 계신 절에 갔었는지, 계림지에 연꽃이 어떻게 피고, 달빛은 어떠했는지 연신 조잘거렸다. 월광은 그런 연화 공주의 수다를 들으며, 연화 공주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즐거웠다. 갑자기 연화 공주가 말을 뚝 끊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월광을 바라보았다.

  “소녀만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태자님께서도 소녀에게 말씀해 주셔야지요. 소녀 태자님의 조문촌 정벌 이

  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월광은 연화 공주의 그 말에 고개를 숙이며 깊이 한숨을 쉬더니 이내 눈마저 감았다. 월광의 그런 모습에 연화 공주는 당황하여 물었다.

  “어디가 안 좋으신지요? 제가 괜한 걸 여쭈었는지요?”

  “아니요. 내겐 조문촌 정벌이 별로 기쁜 일이 아니었기에….”

  월광은 대답 끝에 한숨까지 몰아쉬었다.

  “태자님, 소녀가 잘못했군요. 모르고 여쭈었으니 용서해주세요.”

  “아닙니다. 말씀드리는 게 낫겠습니다. 이 울적한 마음을 공주님이 아니면 누구에게 털어놓겠습니까?”

  “…….”

  월광의 태도를 바라보는 연화 공주의 얼굴에 깊은 근심이 어렸다.

  “그 전투는 내 백성을 죽이는 전투였소. …나는 내 백성을 죽였소. 조문현에서 무력 장군과 다투었소. 무력

  이 내게 자신이 그리 지독하게 싸우는 것은 자기의 백성을 지키기 위함이라 했소. 그가 내게 물었소. 내 백성

  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고 말입니다. 나도 내 백성을 지키고 싶소. 그리고 찬실을 몰아내고 대가야를 바로 세

  우고 싶소. 그러나 나는 모르겠소. 내 백성을 어찌 지켜야 하는지, 찬실은 어떻게 처단하고 가야성을 되찾을

  지 그걸 모르겠단 말입니다.”

  월광이 말을 마치고 고개를 떨어뜨리자 연화 공주가 가녀린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월광의 두 손을 가만히 잡았다. 공주의 손이 닿자 월광은 고개를 들어 슬픈 눈빛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태자님. 너무 걱정하지 마시어요. 곧 찾게 되실 겁니다. 태자님께선 태자님의 

  백성들을 잘 지켜낼 방법을 찾아내시게 되리라, 소녀 그리 믿습니다.”

  “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 조만간 다시 힘을 내어 보겠습니다.”

  월광과 연화 공주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통에 시녀들은 한밤중까지 계림지의 달구경을 해야만 했다.     

  조문촌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서라벌에서의 생활은 며칠이고 먹고 마시는 비슷한 연회로 도리어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 월광에게 연화 공주가 없었다면 갑갑한 궁궐 생활을 어찌 견뎠을지 모를 일이었다. 연화 공주와 차를 나누는 일이 월광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월광은 계림지 석교를 건너 처소로 돌아오다가 문득 어깨가 처진 자신의 그림자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연회에 빠져 그동안 항아궁에 유폐되어 있을 모후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서라벌에서의 평안을 누리는 동안 월광은 대가야의 찬실과 거두를 처단하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다 잊어버린 지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월광은 방안에 불을 끄고 누워 구천의 와신상담의 고사를 떠올렸다.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조문촌에서의 작은 승리를 거두고 돌아와 분에 넘치는 칭송을 들으며 서라벌에서의 안일한 삶에 안주하는 동안, 그리고 연화 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대가야에서 쫓겨난 치욕스런 한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월광은 어둠 속에서 부왕을 시살(弑殺)하고 찬탈한 찬실과 거두를 다시 부여잡았다. 날이 밝자 월광은 월궁의 대전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폐하, 소신 월광 대가야를 불의로부터 시급히 구원하고자 하옵니다. 소신께 다시 대가야 정벌을 명하여 주

  소서.”

  그 말을 들은 진흥왕은 처음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가 거두곤 이내 표정을 준엄하게 바꾸었다.

  “월광 대등. 대가야를 멸하는 것은 신중하고 신중해야 할 짐의 몫이요. 짐은 대가야의 이뇌 임금이 백제, 왜

  와 더불어 우리 신국을 멸하려 했던 일을 짐은 결코 잊지 않고 있소. 이제 대가야는 대등이 아니라 나의 보복

  을 받을 때가 되었소.” 

  긁어 부스럼이라더니 월광은 뜻하지 않게 부왕의 일이 거론되자 몸 둘 바를 몰라 몹시 당황스러웠다. 진흥왕은 월광의 그런 불편한 심기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월광의 황망해하는 모습을 보며 진흥왕은 준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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