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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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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23.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16화.  진흥왕의 정벌


   “허나 찬실은 만고의 역적! 불의를 못 본 체하는 것, 그 역시 불의! 그러니 찬실의 불의를 아는 그대와 나 모

  두에게 그를 징벌할 책임이 있소. 그러니 짐은 책임을 다하여 반드시 찬실을 멸할 것이오, 대등과 그대와 함

  께 말이오.”

   월광은 자신에게 찬실과 대가야를 멸하게 해달라 말을 꺼냈으나 진흥왕이 그 문제에 대해 이미 숙고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며 찬실을 직접 치죄코자 한다는 의기를 보이자 더는 자신에게 대가야를 정벌할 군사를 내어 달라는 청을 넣을 수 없었다. 청은 커녕 진흥왕의 엄중한 눈길에 그만 입술이 붙어 버렸다. 머지않아 진흥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키리라는 것을 예감하는 순간이었다. 월광은 더 청하지  않고 월궁을 물러 나왔다.    

 

  역시 속전속결의 진흥왕이었다. 월광이 진흥왕을 만난 지 사흘째 되는 날, 벌써 서라벌 곳곳에 대가야 토벌의 격문이 나붙었다. 또한 격문을 들고 신라 전역으로 향하는 파발마의 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월광은 새삼 진흥왕이 두려웠다. 진흥왕은 대가야를 일거에 멸하려는 생각인 듯 했다. 대가야에 불 피바람이 걱정스러웠다. 진흥왕의 말발굽 아래 대가야의 백성들과 군병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가야궁이 불타오르고 신라군의 칼끝에 가야의 백성들이 마구 도륙되는 환상에 월광은 괴로웠다. 무고한 목숨을 보전한 채 찬실 무리만을 치죄할 순 없는 것일까? 가야궁을 보전한 채 대가야를 취할 순 없을까? 월광은 다시 월궁에 들어 자신에게 대가야 정벌을 주관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진흥왕은 그런 월광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진흥왕의 웃음을 보며 월광은 처연하기만 했다. 

  ‘왕의 저 미소는 월광 네가 무엇이라고 주제를 모르고 나서느냐는 뜻일 테지.’

   그도 그럴 것이 서라벌엔 인물이 얼마나 많던가? 거칠부 있고, 이사부가 있다. 김무력은 또 어떠한가? 뿐인가. 화랑의 무리를 이끄는 사다함과 무관랑의 용맹이 언 서라벌에 떨치고 있지 않은가? 

  진흥왕은 비로서 입을 열어 월광을 타일렀다. 월광에게 장차 대가야를 다스려야 할 몸이니 왕도를 익혀두는 것이 좋겠다며 병력을 허할 수 없다 했다. 월광은 자신의 미력을 한탄하며 어깨를 늘어뜨린 채 월궁을 나왔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진흥왕은 월광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대가야가 아니라 비자벌로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비자벌 정벌의 주장을 맡아 보라는 것이었다. 월광은 기꺼이 비자벌로 가겠다 했다. 조문촌만이 아닌 다른 공적이 자신에게 절실했으며, 연일 대가야의 어제와 오늘이 성토되는 진흥왕의 월궁에서 월광은 숨이 막혔다. 때문에 하루빨리  서라벌을 벗어나 숨이라도 맘껏 쉬고 싶었으며, 더욱이 다른 장수의 거친 손에 비자벌 백성들의 목숨이 무참히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비자벌국은 가야 십이 번국 중 하나로 낙동강가의 소국이었으나 대가야보다는 신라를 따르곤 했다. 그러하므로 대가야는 비자벌국이 눈엣가시였으나 서라벌이 두려워 감히 치죄(治罪)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비자벌국을 정벌한다니 월광은 진흥왕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냥 두어도 신라를 배신할 비자벌이 아니지 않은가? 월광이 이천의 군사와 미루를 대동하고 비자벌국에 나타나자 비자벌의 조정은 충격과 분노로 떨었다. 대가야의 월광이 형제를 해치려 적국의 군대를 이끌고 왔느냐며 호통치는 나이 든 신하도 있었다. 월광은 묵묵히 비자벌국 노신(老臣)의 호통을 끝까지 다 들었다. 호통을 들으면서 비로소 월광은 진흥왕의 비자벌 정벌의 뜻을 이해했다. 비자벌이 아무리 신라를 추종해도 정벌하지 않는 한 그들은 신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꾸지람을 다 듣고 난 뒤에도 월광은 변명의 입을 열지도, 그렇다고 꾸지람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목석같기만한 월광을 바라보던 아리사왕은 결국 좌중을 진정시켰다. 대전이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아리사왕이 월광에게서 눈을 거두자 비로소 월광이 아리사왕 앞으로 나서 고개를 숙였다. 월광이 차분차분 신라에 항복하고 비자벌의 백성을 보전하라 진흥왕의 뜻을 전하자 비자벌 대전은 금세 다시 소요로 들끓었다. 누군가 월광을 반역이라며 저항의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이번엔 월광의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했다.

  “진흥제께서 당도하시기 전에 결정해야 할 것이오.”  

  “그대를 버린 건 그대의 부왕 이뇌 임금과 대가야이거늘, 그대는 왜 대가야가 아니로 우리 비자벌인가?”

  이번엔 아리사왕이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로 월광에게 물었다. 왕의 수염도 목소리만큼이나 부들부들 떨렸다.

  “그것은 비자벌이 대가야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월광은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리사왕을 등지며 비자벌의 신하들에게 건조하고도 냉냉하게 대꾸했다. 고개를 좌우로 젓던 아리사왕이 월광에게 시간이 필요하다 청했다. 월광이 이틀을 주었다. 이틀이 지났다. 아리사왕이 다시 날이 더 필요하다 했다. 월광은 다시 또 하루를 주었다. 늦춘 약속일이 지난날 월광이 비자벌궁으로 들 채비를 하는데 비자벌 궁에서 월광을 찾아왔다. 아리사왕의 시중이었다. 시중의 뒤로 아리사왕이 월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자벌은 금관국처럼 신라가 되기로 했다며 노왕(老王)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비자벌국에 온 지 이레 만에 월광은 아리사왕과 더불어 월성으로 귀환했다. 진흥왕은 아리사왕에게, 월광에게 그랬던 것처럼 급간의 지위를 내리고 이에 더해 비자벌을 그의 식읍으로 내렸다. 월광은 쓸쓸하고 노회한 얼굴에 웃음기를 잃은 아리사왕을 보기가 애처로웠다. 아리사왕은 내내 월광에게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월광은 아리사왕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아리사왕이 한없이 애처로웠다.     


  진흥왕이 월광을 불렀다.

  “대등, 시험을 잘 통과하시었소.”

  “황공….”

  월광은 비로소 자신을 비자벌로 보낸 진흥왕의 뜻을 알아차렸다. 진흥왕의 무서움이야 진즉 알았지만, 이번에도 월광은 등에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월광의 짐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진흥왕은 태연히 월광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대등, 나와 비자벌로 가겠소?”

  월광이 짐작한 바와 같이 비자벌은 진흥왕이 대가야로 가는 통문인 것이었다.

  “모시겠나이다.”

  월광은 이번 길이 진흥왕의 대가야 정벌이 시작되었음을 확신했다.

  “마음을 굳게 가져야 할 것이요, 태자.”

  월광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대가야 정벌 길이라면 월광은 반드시 자신이 따라야 할 길이라 생각했다. 무슨 수를 쓰든 가야 대가야의 백성을 덜 상하고 대가야의 병졸들을 덜 죽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흥왕이 자신을 태자라는 호칭하는 것은 실로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소신, 그저 대등이 과분할 따름이옵니다. 태자라 호칭하시니 민망하기만 하온즉, 거두어 주십시오, 폐하.”

  진흥왕이 월광을 지그시 바라보며 얼굴에 엷은 미소를 펼쳤다.

  “그대는 곧 대가야의 옥좌를 되찾게 될 것이요.”

  “소신 듣기에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진흥왕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내 이번에 반드시 찬실을 축출할 것이요. 그리고 그 자리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드리리다.” 

  월광이 숙인 고개를 들었다. 진흥왕은 월광이 자신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월광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먼 산을 바라본 채 미소도 지우지 않은 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월광은 진흥왕을 따라 대가야 정벌의 길에 나서기 며칠 전 연화 공주를 찾았다. 공주는 월광에게 처음엔 출전하지 말라며 눈물을 지었다. 월광은 공주의 두 손을 꼭 쥐고 공주의 두 눈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내 반드시 살아 돌아와 공주님을 다시 뵙겠습니다.”

  공주가 월광의 가슴으로 쓰러져 들어왔다. 공주는 월광의 가슴에 안긴 채 흐느낌이 재우느라 훌쩍이다가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태자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부디 상한데 없이 몸을 보전하세요.”

  월광은 연화 공주가 전각을 나서는 자신이 석계를 한 발 한 발 딛고 석계를 건너 무지개 석교를 건너 대전을 돌아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망부석처럼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는 공주를 등 뒤로 느꼈다. 공주가 몹시 애처로웠다.


  월광이 진흥왕을 따라 비자벌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방군주가 모두 모여 이만의 대군을 이루었다. 진흥왕의 친정(親征)계획을 대가야에서도 알았지만 그 동안 찬실은 서라벌에 사신 한 번 보내지 않았다. 사신을 보내 허리를 숙이느니 차라리 신라와 일전을 겨루겠다는 생각이었는지 강 건너 대가야 진영에도 병사들의 숫자가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비자벌에 집결한 신라군에 비하여 대가야 쪽 병력이 확연이 적은 것 또한 분명해 보였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한동안 대치국면을 이어갔다. 보다 긴장한 쪽은 대가야였고, 보다 으르렁대는 쪽은 신라 쪽이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군세를 더해 가며 진흥왕은 거듭하여 도하 훈련만 할 뿐, 실제로 강을 건너란 공격 명령을 쉽게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훈련은 날로 맹렬해졌고 신라군의 훈련이 맹렬해질수록 대가야군의 진영은 긴장이 극도로 치달았다. 진흥왕은 공격이 임박했다는 듯 밤에도 도하 훈련을 지시했고 그럴수록 한밤중의 강 건너 대가야의 경계의 횃불은 점점 늘어갔다. 어느새 대가야 쪽 진영엔 군병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불어나 있었다. 그럴수록 진흥왕은 밤 도하 훈련을 점점 더 맹렬하게 몰아붙였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강 건너 대가야 진영의 병력을 더이상 늘지 않았다. 진흥왕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찬실의 군대가 저 정도였구만. 하긴 나라도 저 정도 병력이면 마음 한 번 독하게 먹고 일전을 치러보자 마음먹었을 게야. 핫 하하하하하하하.”

  진흥왕의 웃음을 듣고서야 월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흥왕의 전략이 그제서야 

짐작이 된 것이다. 

   ‘적과 아군을 모두 속였구나.’

    강 건너 사천쯤의 대가야 군병들은 아마도 온 가야누리에서 징집된 숫자이리라. 대가야에 만약 병력이 더 남아 있다면 그것은 가야성을 지키는 군병들 뿐일 것이다. 월광은 진흥왕에게 소름이 끼쳤다. 진흥왕은 일부러 커다란 군세로 눈에 보이는 도강 훈련으로 상대에게 겁을 주어 상대의 병력을 온통 이리로 집결시킨 것이었다. 강 건너 대가야군의 군세가 커지는 만큼 이편 신라군의 군세도 나날이 불어났다. 그들은 진흥왕의 격문에 호응해 몰려든, 아직 훈련도 받지 못한 군복만 걸친 백성들이었지만 강 건너 대가야 쪽에선 그들이 이제 막 몰려든 백성들이라는 정체를 알아낼 방법도 여유도 없었다. 반면 신라의 백성들에게 진흥왕은 승리의 보증이었으므로 함께 승리를 맛보고 싶은 지원군이 날로 늘어났다. 신라군은 어서 전투가 벌어지기를 기다렸지만 대가야 쪽은 신라군이 기어코 강을 건너 올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다. 그러나 진흥왕은 월광의 예상대로 끝내 강을 건너지 않았다.     


  달이 밝은 밤에, 그날은 도강 훈련 멈추고 진흥왕은 월광을 막사로 불렀다. 비로소 신라의 공격이 전혀 다른 곳에서 시작될 것이라 월광에게 귀띔을 하는 것이었다. 가야산에 딸린 망산을 향해 신라군 칠천 병력이 비밀리에 접근하고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장은 이사부이고, 선봉은 화랑 사다함이랬다. 진흥왕이 대군으로 비자벌에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시위하며 대가야 대부분의 병력을 그곳에 불러들여 묶어 둔 뒤, 예상치 못한 곳으로부터 공격이 시작되도록 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대가야는, 칠천의 신라군이 가야산을 넘는 동안 엉뚱하게도 대부분의 병력을 낙동강 쪽에 모아 놓고 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대가야에게 가야산 방향의 기습은 짐작도 못할 치명적인 공격이 될 것이다. 이사부는 명장이었다. 고구려와 백제군을 한꺼번에 공격하여 도살성과 금현성을 동시에 점령한 바로 그 맹장 이사부가 아닌가. 나무로 만든 괴수로써 우산국의 항복을 받았다는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지장(智將)이 아닌가. 진흥왕의 술잔을 받는 월광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신라군의 가야산 길을 짐작한 것은 오히려 대가야를 응원하기 위해 급히 달려오온 아라가야의 장군 물성이었다. 가야산 줄기의 망산 계곡은 신라에서 대가야로 드는 첩경이니 결코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거듭 주장했지만 찬실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비자벌의 상황을 알기나 하느냐며 물성을 힐난했다. 그렇게도 진흥이 무서우면 낙동강이 아니라 소원대로 빈 망산이나 지키는 겁쟁이가 되어 가버리라며 쫓아버렸던 것이다. 물성은 분했다. 찬실이 천하의 역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을 받아야 하는 것이 분했고, 게다가 자신의 충언마저 외면당하는 것이 분했다. 물성은 망산을 향해 얼마 안 되는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면서 탄식했다.

 ‘충심을 내치다니…, 대가야가 곧 망하겠구나, 아라의 충신 물성이 대가야의 망산에서 끝을 보겠구나.’ 

  아무리 낙동강의 긴장이 크다 해도 서라벌로부터 지척인 망산을 열어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걸 일깨워 주는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다니, 물성은 대가야를 구원하겠다며 아라의 임금을 졸라 달려온 자신에게 진심으로 자괴감이 들었다. 자신을 이리도 푸대접하는 찬실에게 분통이 터지기도 했지만,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더욱 심히 우울했다. 그렇다고 아라가야로 말머릴 돌릴 순 없었다. 대가야 다음은 아라가야의 차례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망산 계곡에 이르러 물성은 소규모의 대가야군을 맞닥뜨렸다. 작은 대가야군의 장수가 물성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자신을 거두라 소개했다. 

  ‘거두? 이자가 바로 아령 공주님의 부군을 밀살(密殺)한 그 거두인가?’ 

  물성은 갑자기 분이 끓어올랐다. 

  “그대가 진정 거두인가?”

  물성의 목소리에 분기가 가득한 것을 알고 거두는 갑자기 몸을 낮추었다.

  “그렇소. 부끄럽지만 소장이 바로 그 처절한 조문촌의 패장 거두요.”

  “네놈이 아라에서 아령 공주님의 부군을 암살한 그놈이냔 말이다. 네놈의 목을 

  먼저 베어야겠다.”

  물성이 거칠게 칼을 뽑아들자 거두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대가야군 쪽에선 거두를 위해 나서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서슬퍼런 상황에 끼이지 않으려는 듯 주춤주춤 물러나기까지 했다.

  “제 목은 나중에 거두시고 우선 제 병력을 거두시길 간절히 바라나이다. 그리고 

  칼끝은 부디 신라군을 먼저 겨누시길 간절히, 간절히 바라나이다.”

  그때였다. 숲에서 무언가 푸스스 인기척이 났고, 이어서 꿩 한 마리가 불쑥 솟아황급히 달아났다. 물성이 병사에게 눈짓하여 다녀오게 하였으나 돌아온 병사는 아무것도 없다 했다. 물성은 께름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지금 당장 급한 것은 거두의 목을 거두는 것보다 진을 세우고 매복을 숨기는 것이었다.

  “내 나중에 반드시 네놈의 목을 거두리라.”

  물성이 거칠게 칼을 칼집에 꽂으며 말에 올랐다. 그는 반나절 동안이나 주변을 샅샅이 점검하고, 요소요소에 병력을 나누어 배치했다. 역시 이 망산 계곡 길은 가야성이 있는 상가라도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 속전속결을 좋아하는 진흥왕이지 않은가. 더욱이 대가야에 비해 월등한 병력을 가진 그는 이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물성은 병력을 망산 계곡에 매복시킨 뒤, 부지런히 수색병을 보내고 거두며 신라군이 언제, 어디쯤에서, 어디로 오는지 동태를 살폈다. 드디어 신라군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방향도 예측한 그대로였다. 대군이었다. 올 것이 왔다. 물성은 긴장된 마음을 스스로 가라앉혔다. 신라의 대병력이 벌써 망산에 들어왔지만 물성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우선 급히 병사 하나를 가야궁으로 말을 달려 보내 신라군의 공격을 알렸다. 그리고 자신은 병사들과 함께 몸을 숨기고 공격할 때를 기다렸다.     


   신라군이 망산 계곡 한 가운데쯤 이르렀을 무렵 물성의 명이 떨어졌다. 계곡 위 절벽에서 미리 준비해 둔 바위와 나무등걸 그리고 화살을 우박과 비처럼 신라군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하지만 대가야와 물성의 연합군은 그 숫자가 턱없이 적었다. 신라군은 기습 공격에 잠시 놀라 흩어지는 듯했으나 곧 전열을 정비하였다. 놀랍게도 신라의 한 장수가 낙하물을 피하며 무섭게 계곡 위쪽으로 치달아 올랐다. 몇몇 신라의 정예병들도 그의 뒤를 따라 올랐다. 당황한 것은 물성의 매복군들이었다. 계곡을 올라온 그 젊은 장수가 가장 먼저 대가야의 매복군에게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고 뒤이어 그의 병사들이 매복군들에게 들이닥쳤다. 매복군도 구덩이를 뛰어나와 신라군에 맞섰다. 요란하게 칼 부딪는 소리가 섞였으며 곧 비명소리가 뿌려졌다. 신라의 젊은 맹장을 눈에 새기며 거두와 물성은 매복을 거두어 오리 쯤 물러났다. 그리고 약속된 곳에서 다시 신라군의 진격로를 막아섰다. 망산을 통과한들 신라군은 규모야 어떻든 알터에서 기다리고 있는 대가야와 아라가야의 연합군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다시 매복을 거두면서 물성은 최후의 결전을 머릿속에 그렸다. 거두가 고개를 떨군 채 뒤를 따랐다.     


  "이천의 신라 정병이여! 나 사다함을 따르라. 대가야 상가라도의 가야성으로 직행한다. 알터의 적들은 뒤의 이사부 장군께 맡기고 알터를 돌파하라.” 

  사다함이랬다. 십육 칠 세쯤의 소년 화랑 사다함의 얼굴은 앳되기만 했다. 그렇지만 몸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건장했다. 그는 골짜기를 솟아오르던 모습 그대로 용맹하게 알터로 돌진했다.

  “물러서지도, 적에게 길을 내어주지도 말라. 목숨으로 막아라.”

  그러나 사다함은 알터의 대가야군 한 가운데를 곧장 짓쳐들지 않고 그들 바로 십여 보 앞에서 갑자기 방향을 비껴 대가야 진영의 어깨를 부수었다. 그제야 물성은 사다함의 계략을 깨닫고 죽을 힘을 그들을 막고자 했으나 천 명도 안되는 병력으로는 중과부적이었다. 아니 그보다 신라군은 전혀 두려움을 모르는 맹수나 다름없었다. 결국 신라군의 거센 공격에 대가야군의 오른쪽 진영이 무너졌다. 무너진 오른쪽 진영을 가야군들이 메우기도 전에 신라군은 터진 봇물처럼 거침없이 그들을 비껴 상가라도 길로 내달았다.

  “안 된다. 저들을 막지 못하면 끝장이다.”  

  물성은 절망할 겨를도 없이 다시 더욱 거대하게 들이닥치는 신라의 군마를 맞이해야 했다. 사다함이 오른쪽 어깨를 깨뜨리고 간 대가야군의 본진 정면으로 신라의 명장 이사부 군의 흙먼지와 함성이 덮쳐왔다.  

  “적과 함께 죽자. 이곳이 우리의 무덤이다.”    

 그러나 물성의 부르짖음이 끝나기도 전에 신라군의 칼과 창이 세차게 부딪쳐 왔고 대가야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알터는 신라군의 일방적인 대가야군 살육의 현장이었다.

  ‘참으로 강군이다.’

  물성은 절망 속에서도 신라군의 강력함에 탄복하며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알터를 지나 진격하는 사다함 군은 가야성에 이르도록 누구에게도 저항받지 않았다. 사다함 군을 막아선 대가야의 도성 가야성은 몇 안 되는 병사들만이 두려움에 찬 모습으로 적의 대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루 위의 병력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다. 이런 위기에 대가야의 대부분의 병력은 어처구니없이 낙동강의 진흥왕 앞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다함은 잠시 병사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고 홀로 가야성과 가야성 주변의 상가라도 숲을 세심하게 살폈다. 가야성이 너무도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따로 병력을 숨겨놓았다던가 예기치 못한 속임수를 감추어 둔 것 같은 특이한 조짐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다함은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중으로 가야성을 끝장내리라 마음먹었다.      


  휴식은 끝났다. 사다함의 엄중한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신라군은 무서운 기세로 가야성으로 돌진하였다. 성루의 가야군이 성 아래로 달려드는 신라군의 머리 위로 화살을 내려 쏘았다. 그러나 흩뿌리는 화살은 성글기만 했다. 성을 지키는 병사의 수효가 턱없이 적은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가야군이 쏘아 내리는 화살이 가랑비라면 이천의 신라군이 성안으로 쏘아 올리는 화살비는 폭우처럼 쏟아지는 소나기였다. 성루의 가야군들이 하나씩 둘씩 쓰러지자 가야군의 화살 비는 더욱 성글어졌다. 가야군의 화살을 방패로 막아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신라군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신라군은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 올린 채 충파차를 밀어왔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충파차(衝破車)를 거세게 밀어붙이자 성문이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성 위의 병사들은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매었다. 그들은 망연자실하여 허둥댈 뿐 충차파 공격을 하는 신라군에 뜨거운 물세례를 안긴다던가 불화살을 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충파차를 거듭하여 충격하자 결국 성문이 깨어지고 말았다. 깨어진 성문을 밀어젖히고 신라군이 도성 안으로 물밀 듯 밀려 들어갔다. 몰려드는 신라군을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성안의 적은 수의 대가야 병사들이 꽁무리를 빼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 뒤로 신라군의 성난 칼빛이 뿌려졌다. 겁에 질린 병사들이 잔인하게 살육되고 마침내 가야성 성루에 대가야의 깃발이 뽑히고 대신 신라군의 깃발이 올랐다. 가야성을 접수한 뒤 신라군이 삼삼오오 도성 구석구석을 뒤지며 곳곳으로 먹물처럼 스며들었고, 곳곳에 숨어 있던 대가야의 대소신료들이 험악한 신라 병사들에게 마구잡이로 끌려 나왔다. 사다함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하루해가 다 떨어지기 전에 사다함의 신라군은 대가야의 도성 가야성을 함락한 것이다. 갑자기 뒤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다함이 놀라 돌아서자 그는 거침없이 다가와 사다함을 감격스럽게 껴안았다. 이사부였다. 알터를 깨끗이 정리한 모양이었다. 이사부 뒤로 피투갑을 한 병사들이 꾸역꾸역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끌리며 줄줄이 포승줄에 엮인 대가야의 포로병들 사이로 장군의 복색을 한 자도 있었다. 거두는 알터 전투에서도 죽지 못하고 부하들과 함께 포획되어 끌려온 것이다.     


  사다함은 가야성을 열어젖힌 뒤로는 모든 것을 대장군 이사부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에 공순(恭順)히 따르기만 했다. 찬실과 거두 그리고 포로가 된 대가야의 대소신료들을 모두 옥사(獄舍)에 가두어 두고 진흥왕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이사부는 가야성의 곳곳을 확인하고 점검하고 정리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아전 만은 절대로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대가야의 병사들 대신 자신의 병사들에게 항아전을 포위하게 하여 유폐를 유지할 따름이었다. 항아전의 주인인 이뇌 왕후를 항아전에 그대로 머물게 하였다. 왕후의 시녀들에게도 지금까지 하던 그대로 왕후를 시중을 들도록 허락하였다. 딱 한 번 항아전을 나온 삼베옷 차림의 왕후를 뵈었으나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할 뿐 상황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신라의 왕녀이자 대가야의 왕후인 그녀를 이사부로서는 어찌해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밀정이 왕의 막사를 나간 뒤 진흥왕은 급히 장수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이상한 것은 장수 몇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왕은 또한 월광을 부르지 않았다. 왕은 결연한 목소리로 장수들에게 바로 오늘 밤이랬다. 대가야 군이 야음을 틈타 퇴각하려 한다는 정보를 놓칠 리 없는 진흥왕이었다. 진흥왕 저녁밥을 일찍 지어 먹게 하고 이미 몇몇 장수에게 조금 멀리 돌아 은밀하게 강을 건너게 해 두었었다. 그럴 때의 진흥왕은 장수와 병사를 직접 부리는 모습이 왕이라기보다 야전 사령관에 가까웠다. 명을 받은 장수들은 밤을 틈타 병력을 이끌고 강 상류 쪽을 멀리 돌아 하반신을 물을 적시며 이미 강을 건너가 있었다. 마침내 진흥왕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이상한 일은 낙동강 건너편의 대가야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으로 보이던 횃불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은 괘념치 말라는 말로 장수들을 안심시켰다. 건너편에서 이쪽을 망보던 대가야 병사들이 뭐라 뒤쪽으로 소리를 지르며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왕의 군대가 거칠 것 없이 강을 건너고 보니 정말로 대가야군들은 퇴각 준비에 정신없던 모양으로 대비가 허술했다. 대가야군은 제대로 맞서지도 못하고 혼비백산하였다. 아직 신라군이 닿기도 전이건만 진즉에 겁을 먹고 말과 병사들을 몰아 뒤로 급히 달아나는 자들도 있었다. 야차같이 달려드는 신라군 앞에 대가야군은 전의를 잃었다. 사방에서 신라군이 달려들었으며, 신라군이 칼을 휘두르는 대로 쓰러졌다. 그들도 가야성 함락 소식이 전해진 모양으로 더이상 지킬 것이 없다는 상실감 때문이었는지 그 동안 강 건너에서 횃불을 치켜들며 진흥왕에 당당히 맞설 것만 같았던 대군 대가야 군의 위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맞서지 못하는 자들은 죽음을 면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눈앞으로 찔러오는 창끝을 피하려 뿔뿔이 흩어졌으나 어느 새 뒤에서 칼날이 날아들었다. 


  이번 기습을 월광은 알지 못했다. 갑자기 떨어진 왕의 명령을 쫓아 온 병력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월광은 진흥왕이 왜 자신을 회의에 부르지 않았는지, 그리고 왕과 자신만이 이편에 남아 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왕이 월광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왕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월광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고 강을 건너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함께 바라볼 뿐이었다. 희뿌연 새벽이 되자 비로소 진흥왕은 월광을 이끌었다. 그들은 함께 걸었다. 강 위로는 어느새 부교가 놓여있었고 왕과 월광은 부교를 건넜다. 강을 건너는 동안에도 왕은 월광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강을 건너자마자 왕과 월광은 도열한 장수들을 만나게 되었다. 

  왕이 지나갈 길이 들판을 가로질러 외줄기로 나 있었다. 주검들이 치워진 길이었다. 지옥 같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을 때 대가야 진영에는 아무렇게나 베어져 쓰러진 병졸들의 주검으로 가득했으며, 주검 위로 흰 안개가 음산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병사들이 왕의 길을 내느라 주검들이 또한 함부로 내던져졌으리라. 아직도 주검들 사이 사이를 다니며 신라의 병졸 몇몇이 창이나 칼을 주검에 간간이 찔러 넣고 있었다. 주검들의 벌판 저편에 왕의 군대와 왕의 막사가 위용을 보였다. 왕의 뒤를 장수들이 따랐으나 어느새 월광은 걸음을 멈추고 섰다. 왕과 장수들이 사라진 들녘의 짙은 안개가 월광을 가려주고 있었다. 안개 속에 홀로 서서 월광은 눈물을 흘렸다. 하염없는 눈물이 그의 뺨 위로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낙동강을 건넌 진흥왕의 대군은 어떤 장애도 없이 이틀 만에 상가라도 가야성에 입성했다. 진흥왕을 맞이하는 이사부 군과 사다함 군의 함성이 가야 궁성을 뒤흔들며 오래도록 끊이지 않았다. 진흥왕이 가야성에 도착하자 큰 승리에도 불구하고 군률이 엄중하기 짝이 없던 이사부 군과 사다함 군에 승리의 기쁨이 허락되었다. 비로소 가야성의 소와 돼지가 구워지고 술이 허락되었다. 승전의 밤이 무르익자 그 동안 절제되었던 승리의 기쁨이 가야성 안에 질펀하였다. 가야성 곳곳에서 가야성의 여인들이 줄지어 잔치 마당으로 끌려 나와 구워진 안주를 나르는 심부름에 허둥대고 신라 병사들이 흩뿌리는 잔술에 몸을 적시며 농락되었다. 함부로 손목을 이끌리며 꾹꾹 울음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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