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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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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24.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17화. 찬실을 문책하다

  월광의 모후가 대전의 진흥왕을 찾아 들었다. 왕후가 초라한 행색으로 예를 갖추려 하자 진흥왕이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왕후의 복색은 삼베옷으로 백성의 복색이었고, 머리에도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왕후께선 나의 육촌 누이가 되십니다. 얼마나 심려가 크셨습니까? 이사부 장군에게 미리 일러두었어야 하

  는 건데 누님께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누이라니요, 이 몸은 그저 죄인일 뿐입니다.”

  “대역죄인 찬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뇌 임금님도 신라에 죄가 없다 할 수 없겠으나 누님이야말로 언제나 

  신라에 충성을 다하셨으니 어찌 죄인이라 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대가야의 왕후요. 그럼에도 …그리 여겨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관산성 싸움 때에도 또 이번의 사다함과 이사부 장군의 망산 진격 때에도 누이께서 전해주신 귀한 소식 덕

  분에 성과가 컸습니다. 강 건너 추문촌에서 이만의 군사를 모아 날마다 북을 울리고 칼을 휘두르며, 말과 병

  사들에게 벌판을 달리게 하여 대가야의 병력을 모두 조문촌에 모아 붙들어 놓은 것과 기습적으로 망산을 넘

  어 이곳 가야성을 취하는 작전을, 사다함은 물론 이사부도 저의 작전인 줄로만 알 뿐 누님의 밀지가 도움이 

  된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뇌 왕후가 진흥왕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입을 열었다.

  “이뇌 임금께서 월광을 내치지만 않았어도 어찌 신라의 왕녀로 돌아갔겠소. 그리고 제 밀지가 무슨 그런 큰 

  힘이 되었겠소. …관산성 싸움 뒤 이뇌 선왕께서 절망하며 말씀하시길, 이제 삼한 땅에 신국의 진흥제는 그 

  상대가 없는 강군(姜君)이 되셨다 하시더니만 과연 그 말씀이 옳았습니다.”

  어느새 진흥왕과 삼베옷 차림의 이뇌 왕후는 차림새로 인한 불편은 모두 잊고 하나도 어색함이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말을 멈추고 이뇌 왕후가 진흥왕을 정색으로 바라보았다.

  “페하, 오늘 대가야는 문을 닫았으나 대왕께 닫히게 된 바, 대가야의 백성이 신국과 대왕께 오래 원한을 품

  지 않도록 선정에 선정을 거듭 베풀어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초라한 복색에도 이뇌 왕후의 침착한 태도에선 기품이 느껴졌다. 진흥왕이 이뇌 왕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후의 충고를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대가야 백성은 신라의 백성과 똑같은 나의 백성입니다. 대가야의 장수들 또한 나의 장수가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월광의 동생 월화공주를 대왕의 후비로 들이신다면 대왕께서 소비(小妃)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여길 수 있겠소만…. 실은 내 어젯밤에 서라벌 병사들의 소행을 모두 알고 있습

  니다 ”

  진흥왕이 이뇌 왕후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양화공주 즉 이뇌왕의 비이자 대가야의 마지막 노쇠한 왕후의 늙은 눈자위가 흥건히 젖어 들었다.

  “왕후의 어심(御心)을 받들겠습니다.”

  진흥왕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로써도 왕후에게 확약을 주었다.  

   

  “어마마마.”

  모후와 진흥왕이 서 있는 대전으로 월광이 들어섰다. 월광의 두 눈은 이미 눈물로 온통 젖어 있었다.

  “태자, 태자가 돌아왔구려.”

  “어마마마, 옥체만강 하시옵니까?”

 왕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복색이 어찌 이러하십니까? 어서 어마마마의 복색을 갖추어 오라.”

 월광이 모후의 모습에 놀라 밖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월광은 또한 모후와 진흥왕의 천연덕스럽기만 한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월광은 늦지 않았습니다, 왕후마마. 월광 태자는 이제 대가야의 새로운 왕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대가야는 

  이제부터 강한 신라군이 지켜 줄 것입니다.”

  진흥왕의 말을 듣자 이뇌 왕후가 진흥왕을 향해 돌아서더니 천천히 몸을 낮추고 무릎을 꿇어 엎드리며 큰절을 올렸다. 월광이 곁에 함께 엎드렸다.

  “이 늙은이가 폐하의 말씀을 옳게 들은 것이겠지요?”

  “누님, 일어서시지요. 짐의 결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누님, 아니 왕후 폐하. 그것은 아라가야를 마저 도

  모한 뒤의 일이 될 것입니다.”

  왕후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하여 아라가야를 도모하신다 하십니까?”

  진흥왕이 정색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누님께선 이번 전쟁에 아라가야가 끼어든 것을 모르십니까? 가야산에서 잡힌 포로 중 아라가야의 장졸들

  이 적지 않았습니다. 혹, 물성을 모르십니까?”

  왕후가 고개를 외로 돌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찬실이 그놈이 그예 아라까지 끌어들였군요. 물성은 이뇌대왕 삼후비의 오라버니 되는 사람이니, 내 모를 

  리 없소. 그의 목숨이 아깝게 되었소이다.”

  “왕후마마, 마음을 강건히 하시지요. 물성은 우리에게 모진 칼을 겨누었던 자요. 그는 참수될 것입니다.” 

  어느새 진흥왕은 이뇌 왕후의 호칭을 누이에서 왕후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    

 

  상가라도 가야궁 너른 마당의 죄인들 중엔 아라가야의 포로들도 섞여 있었지만 대개 찬실의 신하들이었다. 많은 죄인들이 머리를 풀린 채 끌려 나와 있었지만, 월광의 두 눈은 오직 두 사람, 찬실과 거두만을 노려볼 뿐이었다. 진흥왕이 흰 수염의 이사부와 함께 국문장에 나타나자 누군가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렸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폐하, 살려주십시오. 대가야에서 태어나서 대가야의 신하가 되었을 뿐, 신라에 태어났으면 신라의 신하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신라의 신하로 살겠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살려달라는 애원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 국문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진흥왕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자, 신라의 장졸들이 처음의 그 죄인에게 달려들어 곤봉을 마구 휘둘렀다. 곤봉에 머리를 맞은 죄인이 피를 쏟고 쓰러지자 소란은 대번에 가라앉았다. 죄인들은 다시 몸을 낮추고 두려움에 떨었다.

  “찬실을 끌어내라!”

  찬실이 앞으로 끌려 나와 거칠게 무릎 꿇려졌다.

  “대등 월광.”

  진흥왕이 노여움에 가득 찬 월광을 불렀다.

  “예, 폐하.”

  찬실 앞에서 진흥왕이 느닷없이 자신을 신라의 벼슬 이름으로 부르자 월광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찬실을 어찌하면 좋겠소?”

  “폐하, 소신이 몇 마디만 물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월광의 목소리가 메말라 갈라졌다.

  “그리하시오.”

  진흥왕이 월광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월광은 이글거리는 눈빛을 쏘며 찬실에게로 내려갔다.

  “네놈은 어찌 아바마마를 도모하였느냐?”

  분을 억누르고 물었으나 찬실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흥, 신라 놈의 피가 흐르는 네놈의 물음은 가당치 않다.”

  월광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찌하여 아바마마를 해하였느냐니까?”

  찬실의 비웃음 가득한 입꼬리가 더욱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그예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대가야의 임금이 신라의 더러운 개에게 대답해야 하느냐? 어서 목이나 베어라.”

  월광은 찬실의 비아냥에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곁에서 자신을 보위하던 부장에게 갑자기 와락 달려들어 칼집에 든 검을 뽑아 들었다.

  “어마마마는 또 어찌하여 죄를 묻고 유폐하였느냐?”

  그러자 이번엔 도리어 찬실이 눈을 치켜뜨며 월광에게 호통을 쳤다.

  “왕후는…, 왕후는 서라벌의 첩자였느니라. 첩자가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내 오히려 왕후를 참하지 못

  한 것이 한이거늘….”

  “네놈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는구나. 정령 죽고 싶은 게로구나.” 

  월광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찬실의 얼굴에 칼을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대등!”  

  장군 이사부가 급하게 진흥왕의 앞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월광은 차마 칼을 내려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내려뜨리고 말았다.

  “이사부 장군은 나서지 마시오. 대등의 뜻대로 하시오. 그리 소원했던 원한을 풀 기회요.”

  진흥왕의 말에 다시 칼을 들어 올렸던 월광은 결국 다시 칼을 내려뜨렸다. 왕 앞에서 피를 보일 순 없었다. 월광은 칼을 내던지고 찬실에게서 돌아섰다. 그와 동시였다.

  “찬실을 베어라.”

  진흥왕의 입에서 벽력같은 명령이 떨어지고,‘옛’하는 대답이 들리는가 했더니 짧은 비명이 터졌다. 급히 몸을 돌이킨 월광의 눈앞에 찬실의 목이 나뒹굴고 있었다. 월광은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가 쳤다. 

  ‘찬실에게 죄를 묻지도 않고 즉결 처분이라니….’ 

  월광은 진흥왕을 겪을수록 점점 더 진흥왕이 무서워졌다.

  “거두와 물성도 참하고, 다른 죄인들은 죄과를 따져 참하거나 노비로 끌어가라.”

  짧게 명을 내린 후 진흥왕은 몸을 일으켜 국문장을 빠져 나갔다. 월광도 몸을 일으켰다. 항아전으로 향했다.


 모후가 몸을 일으켜 월광을 맞았다. 월광은 모후 앞에 엎드렸다. 까닭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음을 참지 않고 모후 앞에 쏟아놓았다. 모후의 가녀리고 늙은 손이 월광의 등을 다독거렸다. 모후의 늙은 두 눈도 눈물에 젖었다. 왕후는 어의(御衣)의 복색으로 회복되었으나 이미 왕후는 늙고 주름이 깊었다.

  “울지 마시오, 태자. 태자는 늦지 않았소.”

  “어마마마….”

  월광은 차마 국문장에서의 찬실의 일을 고하지 못했다. 


  월광은 은밀히 미루를 불러들였다. 곧 신라가 아라가야로 들이닥칠 터이니 서둘러 대비하라는 전갈을 넘겼다. 신라의 대등으로서 자신의 행동이 이적(利敵)행위인 줄은 알지만 아라가야에 닥칠 불행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루를 보내놓고 월광은 곧 고개를 떨어뜨렸다. 전갈을 받은들 아라가야는 저 막강한 적 신라를 무슨 수로 막아낼 것인가. 결과는 눈에 보듯 뻔한 것 아닌가. 아라가야가 곧 진흥왕의 커다란 발아래 짓밟힐 것을 생각하니 몸이 저절로 떨렸다. 아라가야로 시집을 간 셋째 고모 다령 공주와 아라가야를 바탕으로 왜를 활동 무대로 삼고 있는 둘째 고모 아령 공주가 연이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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