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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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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Feb 26. 2024

가야 태자 월광기(記)

제18화.  아라가야를 폐하다

   월광의 걱정은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진흥왕은 달변이었다.

  “장수들은 들으라. 짐은 서라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라가야의 소식을 예서 기다리겠다. 아라가야는 이번 가야산 망산 전투에 적지 않은 병력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대가야와는 아무리 형제 사이라 하나 찬실은 만고의 역적이니, 이를 돕는 자 또한 역적인 것이다. 짐은 의를 위하여 일어났으나, 이제 저 아라가야는 불의의 대가야를 도왔으니 이는 곧 아라가야가 의가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아라가야를 어찌 그대로 두고 서라벌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나는 기필코 아라가야를 폐할 것이다. 다들 알아듣겠는가?”

  진흥왕의 웅변이 극에 달하자 장수들과 도열한 병사들도 흥분했다. 한 장수가 선

창을 했다.

  “아라가야로 가자, 아라가야로 가자.”

  병사들이 화답했다. 

  “아라가야로 가자, 아라로 가자.”

  진흥왕의 눈짓에 흰 수염의 이사부 장군이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제지하자 차츰

차츰 흥분이 가라앉았다.     

  “아라가야를 멸하는 길에 군사 사천을 이명 장군에게 줄 것이며, 대등 월광을

   군사(軍師)로 삼을 것이다. 아라를 도모하라.”

  월광은 깜짝 놀랐다. 왜 하필 자기일까? 그러나 대답을 지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폐하, 사천은 너무 적은 수 아닐런지요?”

  이사부 장군이 진흥왕에게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진흥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라가야는 이미 물성에게 많은 병력을 딸려 보낸 바 있소. 간자(間者)들에 따르면 성산성은 이천 병력도 아니 된다 하오. 너무 걱정마시오, 장군. 월광과 이명이 잘 해낼 것입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이명이 비로소 진흥왕에게 허리를 굽혔다.

  “폐하, 신 이명 미력을 다 하겠나이다.”

  월광도 이명을 따라 허리를 굽혔다. 진흥왕이 이명에 이어 잠시 월광을 쳐다보고는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다행이지 않은가.’ 

  월광은 아라가야를 어떻게든 덜 다치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고심했건만 월광은 

대가야의 단 한 목숨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지 않았는가. 아라가야의 백성이나 병졸들은 모두 대가야의 백성들이나 병졸들과 다름없는 가야의 한 백성들인 것이다. 저

들의 목숨을 헛되이 거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저 살벌한 무력이나 사다함

이 아니라 당연히 자신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는 진흥왕의 배려란 말인가? 월광

이 진흥왕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진흥왕도 월광의 마음을 웬만큼은 

들여다 볼 줄 알게 된 것일까. 월광은 진흥왕을 한 번 더 쳐다보고 진흥왕의 앞을 

물러 나왔다. 출전을 이틀 앞둔 날 밤. 월광은 은밀히 야음을 틈타 미루를 불렀다.

미루는 연신 어둠 속에서 월광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루에게 서찰은 없었다. 다

만 월광의 전언을 거듭거듭 확인한 후 빈 몸으로 성 밖을 나섰다. 미루가 성 밖을 

나선 지 한 참 후에야 저 멀리 말 한 필이 아라가야 방향으로 유성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월광은 몸을 돌이켰다.     


  “아니, 군사. 아라가야 놈들 이상도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무서워도 그렇지 이렇게 코빼기도 안 보이다니

  요?”

  “그러게 말이오. 벌써 성산성이 코앞이거늘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는군요.”

  월광은 장군 이명에게 태연히 대답했다. 아라가야로 가는 길은 거의 빈 길이나 다름없었다. 백성들도 눈에 잘 띄지 않았으며, 어떤 저항도 없었다. 신라군은 마치 행군하듯 순탄하게 남하했고, 마침내 성산성에 닿았다. 성산성에 닿아서 이명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성 위에 군사들이 지나치게 적을 뿐만 아니라 우릴 보고도 아무런 대응도 없이 그저 물끄

  러미 보고만 있다니….”

  이명이 부장을 시켜 성산성에 외치게 했다.

  “우리는 신라군이다. 아라가야의 왕은 어서 나와 항복을 하던가 아니면 한 판 승부를 겨루자.” 

  그러나 성 위에선 어떤 반응도 없었다. 이명이 궁수를 동원하여 한 차례 소나기 화살을 퍼부었으나 아라가야의 병사들은 잠시 방패를 들어 막을 뿐, 화살이 그치자 다시 그 자리에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군사를 시켜 성문을 열어 보게 하시오.”

  월광은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군사 십여 명이 힘을 주어 성문을 밀자 무거운 성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는 것이었다. 

  “좌장군 최실은 군사를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가 보시오.”

  최실이 수백의 군사를 이끌고 조심스럽게 성 안으로 들어섰으나, 성 안에서도 역시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최실이 성 밖으로 나와서 소리를 질렀다.

  “장군. 군사들이 성 안에 있사온데,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계책이 있는 듯하니, 군사를 다시 물

  릴까요?

  이명이 월광을 쳐다보았다. 

  “내가 가보겠소.”

  월광이 말에서 내려 성 안으로 향했다. 그러자 월광의 뒤를 군사들이 우르르 따랐다. 이명도 뒤를 따랐다. 최실의 말대로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었다. 성산성 너른 마당에 칼과 창, 방패며 화살, 활 등이 높이 쌓여 있었다. 칠백 쯤 되어 보이는 병사들도 모두 빈손이었다. 

  “이 무슨 해괴한 광경이오. 아무래도 왕이 겁을 먹은 듯 하오이다. 하하하….”

  그러나 이명의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아라가야 병사들의 대오 뒤쪽 먼 곳으로부터 무엇인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명이 웃음을 뚝 끊고 긴장한 얼굴로 월광을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한 뒤 짐짓 소리를 높였다.

  “멈춰라. 그대는 누구인가?”

  최실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며 모습을 뚜렷이 드려냈다. 그는 곧 아라가야의 왕 여령이었다. 

  “가만 가만. 멈춰라.”  

  이명이 병사들에게 무어라 명하려는 것을 월광이 급히 만류하였다. 여령왕은 그들 십여 보 앞까지 다가와서야 걸음을 멈췄다. 

  “월광아, 네가 올 줄 알았다. 서라벌에 귀순하더니 신라에 큰 공을 세웠더구나, 하하하하….”

  여령왕의 커다란 웃음소리에 월광은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래, 제 나라를 배신하여 정벌하는데 앞장섰으니 신라에 네 영예가 드높겠구나. 아하하하하하….”

  월광은 여령왕의 비웃음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여령왕의 꾸짖음이 진정으로 수치스러웠다. 

  “군사. 왜 이러시오.”

  월광이 현기증으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최실이 얼른 달려들어 부축하였다. 이현이 부관에게 명했다,

  “왕을 체포하라.”

  여령왕의 웃음소리가 다시 성산성 하늘로 치솟았다.

  “그럴 것 없다. 내 그대의 수고를 덜어 주리라. 잠시들 스무 걸음씩 들만 물러나 주시오.”

  이현은 의아했지만 여령왕의 눈빛이 너무도 진지하여 왕의 말을 따랐다. 최실도 월광을 부축하여 스무 걸음을 물러섰다. 이현은 군사들에게도 모두 스무 걸음씩 물러서게 했다. 그러자 여령왕은 다시 월광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월광은 내 말을 똑바로 들으라. 내가 곧 아라이니라. 나 하나가 곧 아라 전부이니라 내 말을 알아들었느냐?

  내가 닫히면 아라가야가 닫히는 것이란 말이다.   알아들었느냐?” 

  그러나 월광은 여령왕의 말뜻을 금방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했다. 여령왕이 월광의 모습을 미심쩍게 바라보다가 소리 나게 혀를 쯧쯧 찼다. 그러다가 여령왕은 체념한 듯 월광에게서 눈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양팔을 활짝 펼치고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외쳤다.

  “자, 이제 다 되었다. 바로 지금 내 명을 시행하라.”

 여령왕의 말이 끝나자, 어디선가 쉭쉭 바람 소리가 일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수십 발의 화살이 왕에게 날아들었다. 월광과 병사들이 놀라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수십 발의 화살이 일시에 여령왕의 몸을 꿰뚫었다. 화살을 맞고도 여령왕은 한참이나 더 껄껄 웃다가 결국 입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여령왕이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월광은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최실을 황급히 밀쳐내고 칼을 뽑아 들고 명을 내렸다. 

  “활을 쏜 저놈들, 저놈들을 척살하라.”

  월광의 명이 떨어지자 신라의 병사들이 활을 들고 있던 아라가야의 이십 여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비명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그러나 그뿐, 아라가야의 병사들은 칼에 맞아 쓰러질 뿐 그대로 저항이 없었다. 

  “아니, 그만. 멈춰라, 모두 멈춰라.” 

  월광은 갑자기 여령왕의 말뜻을 깨달았다. 여령왕은 저들을 지키고자 홀로 자신만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닌가? 저들만이 아니라 아라의 백성들도 해치지 말라는 부탁이었구나. 자신이 곧 아라이니 자신이 죽으면 아라 전부가 죽는 것이라 했다. 더 이상의 살상을 하지 말라는 부탁이지 않은가? 월광은 이제야 그걸 깨달은 자신의 미련함에 가슴을 쳤다. 살육을 멈춘 병사들은 칼을 휘두르는 대신 무저항의 아라의 병졸들을 묶거나 무릎을 꿇렸다. 최실이 성산성을 샅샅이 뒤졌으나 더 이상의 사람들은 없었다 보고했다. 그 말을 듣고 이번엔 월광이 수십의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한번 성산성을 뒤졌으나 다령공주나 아령 공주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라가야에서의 일을 진흥왕에게 전갈을 낸 뒤 월광은 대취하여 쓰러졌다. 취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금관국 구형왕의 아들 무력은 자신이 지독히 용맹을 내뿜으며 사는 것이 자신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라 했다. 그런데 이번엔 아라가야의 여령왕은 자신의 병졸들과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스스로 희생하지 않았는가? 자기 혼자 죽음으로써 자신의 병사들과 백성들을 구하고자 하지 않았는가? 무력은 용맹을 다해 칼을 휘두름으로써 자기 백성을 지킨다하더니, 여령왕은 홀로 죽음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구하고자 하였다. 자신은 대가야의 백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월광은 만취하여 다음 날도 쉬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라가야의 성산성이 신라의 수중에 떨어지고 나자 남은 가야의 번국들은 스스로  빗장을 풀었다. 그리고 성산성이 함락된 지 나흘쯤 지났을 때였다. 어디선가 소속을 알 수 없는 일곱 척의 군선(軍船)이 아라가야의 높고개 포구 앞바다에 나타났다고 했다. 신라군이 긴장하여 대치하고 나루에 병력이 더욱 집결되자, 배 안의 병사들은 상륙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음 날 새벽녘에 안개와 더불어 사라졌다고 했다. 미루의 보고에 월광은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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