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저녁 내내 싱글벙글이다. 봄날씨처럼 화사하다. 궁금하지 않은 척 참고 묻지 않자 오히려 참지 못한 아내가 이유를 실토한다. 청소하다가 우연히 19년 전 일기장을 읽게 된 즉, 자기가 그토록 기막힌 효자 효녀의 엄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단다. 아내도 간간이 일기를 썼던 모양이다.
막내 녀석이 유치원 급식의 보조식으로 나온 요쿠르트를 제 어미 준다고 먹다가 반을 남겨 왔단다. 요쿠르트라면 아이들 입으로도 한 모금을 크게 넘지 않을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음료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지만 앙증맞은 효심(?)이 귀여운 건 사실이다. 그 반 모금의 요쿠르트가 이렇듯 십 오륙 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서도 이런 약효를 발휘하다니 세상엔 산삼 아니라도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영약이 많은가 보다.
'녀석, 요쿠르트가 먹기 싫어 남겨 온 거 아니었을까?'
내 딴지는 아내의 삐죽거리는 입술과 눈흘김을 불러왔으나 나는 일기장을 넘기며 회피한다.
나와 아내가 바깥 일로 늦어지자 딸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단다. 녀석이 배가 고프다니, 아내는 미안한 목소리로 큰 아이에게 밥솥에 찬밥이나마 있으니 동생과 함께 차려 먹으랐다나. 아이들의 고픈 배도 염려되고 일도 마침 마무리 단계라 서둘러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쇼파 위에 제법 부푼 배를 안고 씩씩거리고 앉아 있었나 보다. 아내는 측은지심은 다 어디에 잃어버렸는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났더란다. 그렇잖아도 비만 경계선에 있는 딸아이를 경멸조로 꾸짖으려는데 아들 녀석이 막아섰더란다.
“아니에요, 엄마. 내가 엄마 아빠 드실 밥 남기자고 했더니, 누나가 이건 찬밥이니까 엄마, 아빠는 따뜻한 밥을 새로 지어드리자고 했어요.”
그제야 전기 압력 밥솥이 칙칙거리며 김을 내뿜고 있던 걸 발견했다나. 아들 아니었으면 아내는 하마터면 큰일 낼 뻔 했다며 안도한다. 아내의 일기처럼 아내는 참 착한 딸을 두었다. 엄마 아빠를 위해 찬밥을 다 먹어 치우는(?) 착한 딸을 두었다.
며칠 전부터 만화시계에 관심을 보이는 막내아이에게 시계 공부라도 되려나 하는 생각에 선뜻 지갑을 열었단다. 그랬더니 녀석이 제 엄마 목을 껴안아 키를 낮추곤 귀에 대고 속삭이더란다.
'저기 연두색 만화시계, 다음 주 엄마 생일에 사 줄게, 엄마. 나 용돈 10,000원 모았어.' 그러더라나.
남편도 까먹는 자기 생일을 기억해주는 아들이 너무 깜찍해 녀석을 꼭 껴안아 주었단다. 녀석 때문에 내 욕이 기록되는 기분 묘한 순간이다. 생각해보니 왠지 마음이 살짝 허전하다.
이십 년 가까이 지난 일이건만 내겐 없는 아내만의 추억으로 아내가 부러웠다. 내겐 없는 추억들 아닌가. 하긴 아내의 삶이 나보다는 좀더 부하(負荷)가 있는 삶이었던 만큼 나보다 이윤이 좀더 있은들 어떠랴 하면서도, 나는 실상은 십 수년 전의 아내의 일기로 아내가 부러운 못난이다. 이런 못난이론 안 되겠다. 잠시 아내 몰래 명나라 묘협 스님의 보왕삼매론의 한구절로 짧은 수양에 든다.
이익이 난 것을 보매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맹랑한 소꿉놀이
-아이고오
또 술이야
내가 못살아 못살아
-아니
당신 또 옷 샀어?
카드 빚 또 늘겠네 또 늘겠어
-그러는 당신은
여자 마음을
알기나 해?
알기나 하냐고?
-주식만 오르면
달콤 풍선껌
얼마든지 사 줄게
나만 믿으라구
-애들만 아니었으면
내 인생
요 모양 요 꼴은
안 됐을 거야
-쉿,
애들 들어요
인생이란 게 다
애들 기르는 재미 아닌가
-또 또 또
그러는 당신
뽀미 기저귀는 갈아 줬어?
.
.
.
인형 뽀미가 어이없어
소꿉놀이 하는 두 애들을
눈 동그랗게 뜨고
빤히 올려다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