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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비즈니스 스킬

by 오월 나무

나는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일명 뚜벅이다. 다행히 직장이 강북이라 러시아워 시간대에도 늘 앉아서 오갈 수 있다. 출근 시간에는 여유 있게 책을 읽거나 음악도 듣고 영어공부를 하며 나름대로 시간을 보낸다. 일정한 시간이나 장소에서 한정된 시간 안에 하는 활동이 가성비가 높다는 것도 이때 알게 됐다.


퇴근 시간은 좀 다르다. 하루 일로 지쳐서 인지 독서나 영어공부에 집중이 안 된다. 가볍게 인터넷 뉴스를 보는 정도인데 때로는 그것도 집중이 안 된다. 퇴근길 내 머릿속에는 그날그날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나 저녁 메뉴가 뒤섞여 있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어야 하나?’ 주부 경력 25년 차인 나는 경력에 비해 능력은 꽝인 무늬만 주부다. 모든 집안일에 서툴고 느리다. 그래서 나에게 집안일은 늘 임시직 같아서 착 감기는 맛이 없다.


저녁 준비를 위해서 퇴근길에 시장에 들르곤 한다. 내가 사는 대단지 아파트 건너편은 단독이나 다가구 주택들이 많은 동네이다. 흔히 그렇듯이 이 동네에도 제법 큰 재래시장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 대형마트가 있어서 장보기가 편하고 집에서도 가깝지만 왠지 퇴근시간에는 재래시장으로 발길이 간다. 마트의 써늘한 기운과는 달리 재래시장에는 사람 사는 온기가 있다. 이 온도의 차이는 꼭 마트의 에어컨이나 재래시장을 채우고 있는 해 질 녘 햇살 때문만은 아니다. 재래시장은 손님들을 부르는 상인들의 다채로운 목소리와 가족들의 저녁 식탁을 위해 먹거리들을 찬찬히 살피는 손님들로 들떠 있다. 가판대에 있는 야채와 과일들도 제 색깔로 빛이 난다.



지하철역 3번 출구를 나오면 시장 입구에서 작은 바구니에 감자, 양파, 오이, 깻잎 등을 조금씩 담아 놓고 파시는 할머니들이 계신다. 그 야채들을 판 돈이 할머니들의 용돈이나 생활비가 되겠거니 생각하며 그것들을 자주 사곤 한다. 집에서 기른 듯 보이는 야채들은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여리고 뽀송하게 생겼다. 조롱박처럼 예쁘게 자란 애호박, 활처럼 휘어지고 보드라운 오이, 크기가 올망졸망한 햇양파,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감자, 솜털이 뽀송한 깻잎, 그리고 직접 손으로 까고 계시는 뽀얀 도라지까지 어느 것 하나 탐나지 않는 것이 없다. 결정을 못 하고 이것저것 살피고 있는데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다가와 할머니의 물건들을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길이 이내 꽈리고추에 머물렀다. 꽈리고추는 이미 할머니의 손길을 거쳐서 꼭지는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연한 초록빛 몸에 요리조리 패인 주름으로 꽈리고추는 더욱 탱글탱글하고 싱싱해 보인다.


“할머니, 이 꽈리고추 맛있어요?”

“그럼, 맛있지.”

물어보나 마나 한 그녀의 질문에 할머니는 꽈리고추 마냥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담고 대답한다. 할머니의 치아가 듬성듬성 몇 개 비어 있다.

“할머니, 신랑이 꽈리고추를 좋아해서 만들어 보고 싶은데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맛이 없게 만들까 봐 걱정이에요.”

“아이고, 걱정할 것이 뭐가 있어?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신랑이 엄청 맛있다고 좋 아할겨.”

“어떻게 만들면 돼요?”

“먼첨 꽈리고추를 깨끗하게 씻어서 반으로 잘라. 그런 담에 거기다가 간장하고 설탕, 물엿 조금씩 넣고 볶으면 되는거여. 하나도 안 어렵지? 집에 멸치 있으면 그것도 좀 넣고 마지막에 깨도 좀 뿌리고.”

꽈리고추를 팔기 위해 요리강연까지 한 할머니의 손은 이미 비닐봉지에 꽈리고추를 담고 계신다. 그런데 그때 다시 그녀가 의심의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할머니, 이 꽈리고추 매워요?”

“어? 맵냐고? 신랑이 매운 거 좋아해? 안 매운 거 좋아해?”

“신랑은 매운 거 잘 못 먹어요.”

“그래? 마침 잘 됐네. 이 꽈리고추는 하나도 안 매워. 걱정하지 말고 사 가.”

그제야 안심이 된 듯 그녀는 할머니의 손에서 비닐봉지를 받아 들며 돈을 지불한다.


이 광경을 죽 지켜보던 나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고 얼굴 가득 차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만약

“신랑이 매운 거 좋아해? 안 매운 거 좋아해?”라는 할머니의 질문에 그녀가

“신랑은 매운 거 좋아해요.”라고 대답했다면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래? 마침 잘 됐네. 이 꽈리고추는 적당허니 매워서 매운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좋아할 거여. 걱정하지 말고 사 가.”

할머니의 빛나는 이 비즈니스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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