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을 할 때 연수를 하러 가면 가끔 강사분들이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보라는 요청을 할 때가 있다. 그때 나의 버킷리스트에 빠짐없이 꼭 등장했던 것 중의 하나가 전원주택을 갖는 것이었다.
내가 상상하는 전원주택의 입지는 이렇다. 제법 거리를 두고 뒤에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고 앞에는 넓은 들판이나 강, 혹은 호수가 보이는 곳에 자리한 200평 정도의 직사각형 모양의 땅이면 좋겠다. 지대는 앞에 펼쳐진 들판보다는 조금 높되 그렇다고 산 중턱은 아니어야 한다. 흔히 말하는 뷰, 즉 확 트인 조망권을 위해서 지나치게 축대를 쌓아 인공적인 느낌이 드는 곳은 왠지 전원주택 같지가 않다.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 그런 집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집을 나와 주변을 산책할 때 내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의 경사 정도면 좋겠다.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워도 운전자가 겁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이면 좋지 않을까 싶다.
나는 너무 큰 전원주택을 갖고 싶지는 않다. 우선 집은 30평이 넘지 않는 크기의 단층이면 좋겠다. 내가 단층집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릎이 안 좋아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불편해서기도 하지만 2층 이상의 집은 왠지 자연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다. 멀리 있는 산이나 가까이 있는 나무들, 그리고 주위에 펼쳐진 논밭과 어울리려면 단층집이 좋다. 전원에서 2층 집은 왠지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기만 잘났다고 폼 잡고 있는 아웃사이더 같아서 친근하지가 않아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야트막해서 겸손해 보이는 집, 나는 그런 단층집이 좋다.
집의 방향은 남남동향이면 좋겠다. 전원의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답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아침잠이 없어지는 우리 부부를 너무 일찍 깨우지 않을 정도의 햇볕이면 족하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마당에 나와 앉아 나무들 마냥 광합성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햇살을 담을 수 있는 남남동향의 집이 나는 좋다. 남쪽으로 낸 큰 창으로 하루 종일 햇살이 들어와 한겨울에도 따뜻한 온기가 집안 가득 차오를 수 있는 집, 그래서 가끔씩 문득 찾아올 외로움도 녹여줄 수 있는 남남동향의 집을 갖고 싶다.
200평 땅에 30평 집만 덩그러니 올려진다면 그건 결코 전원주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머지 170평은 어떻게 디자인하면 좋을까? 전원주택에서 내가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 봤다. 먼저 마당 오른쪽 가장자리에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고 그 아래 평상을 놓을 것이다. 키 큰 느티나무와 평상, 전원주택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상했을 풍경이다. 느티나무는 성장 속도가 무척 빨라서 10년이면 큰 그늘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상상만으로도 흐뭇하고 행복해진다.
다음, 마당의 왼쪽 가장자리에는 계절마다 동무가 되어줄 꽃나무를 심고 싶다. 봄에는 보일 듯 말 듯 피어 오르는 산수유와 백목련과 자목련의 큰 꽃망울을 보고 싶다. 그리고 미스김 라일락을 심어 바람에 실려오는 달콤한 향기로 봄을 만나고 싶다. 여름내내 피고 또 필 배롱나무는 전원주택의 백미다. 매끈한 배롱나무 줄기와 진분홍색 꽃은 보는 이의 마음을 금세 사로잡는다. 가을의 꽃은 단풍이다. 가을이면 빨갛고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나 은행나무도 아름답지만 가을 단풍의 으뜸은 감나무이다. 늦가을 울긋불긋 물든 감나무 잎과 그 잎들 사이로 보이는 빨갛게 익은 감은 어린시절 향수까지 선사하는 가을의 꽃이다. 한 켠에 동백나무를 심어 겨울에도 꽃을 보고 싶다. 눈 속에서 빨갛게 타오를 동백은 무채색의 겨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계절마다 필 꽃들 사이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호사를 누릴 그늘막 설치도 놓치면 안 된다.
전원주택의 꽃이 여기서 그치면 섭섭할 일이다. 베란다 문만 열면 바로 볼 수 있는 곳에 예쁜 꽃들을 심고 싶다. 맨 앞에는 키 작은 꽃잔디와 채송화를 심고 양 옆으로는 추억의 붓꽃을 심으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봉선화. 시골 꽃밭의 주인공은 봉선화여야 한다. 꽃밭 한가운데에 봉선화를 심고 하얀색, 분홍색, 빨간색 봉선화 꽃잎과 초록 잎을 따서 꽃물도 들여야지. 친구들이 놀러 와서 함께 봉선화 꽃물을 들일 수 있다면, 한 편의 드라마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 뒤로는 꽃의 여왕 작약과 큰 꽃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를 알게 해 준 수국도 심자. 너무 욕심을 내서 꽃밭을 가득 채우려고 하지 말고 공간을 비워 두자. 세상에 예쁜 꽃은 무궁무진하니까 아껴서 심자. 마지막으로 조팝나무와 코스모스, 그리고 해바라기가 울타리가 되어 준다면 이제 전원주택은 거의 완성단계가 된 것이다.
전원주택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라고 해도 텃밭이다. 전원주택에 텃밭이 없다면 물 없는 수영장과 같다. 집의 서쪽에 위치한 주방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문을 열면 곧바로 텃밭이 있으면 좋겠다. 주방을 나와 슬리퍼만 갈아 신고 몇 걸음만 가면 식탁에 올릴 신선한 야채를 마련할 수 있는 텃밭이 있는 집, 전원주택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로망이다. 주방에서 가까운 곳에는 상추, 고추, 가지, 깻잎 등 키 작은 것들을 심고 그 뒤로 오이, 호박, 토마토, 블루베리를 심을 것이다. 해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수박이나 참외도 심어보고, 고구마나 감자를 심어도 좋겠다. 키 큰 옥수수도 심어보고 싶지만 200평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옥수수는 포기하자.
다정한 사람들이 찾아와 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그들과 함께 하는 식사 장소는 계절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목련과 라일락이 피는 봄에는 그들 옆에 있는 그늘막에서 샐러드나 파스타를 먹고 싶다. 느티나무 잎이 연초록으로 피어날 5월이나 무성하게 우거지는 여름에는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서 바비큐를 하면 어떨까! 늦가을에는 감나무 단풍 아래서 따뜻한 차를 마시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겨울, 추수가 끝나 더욱 넓어진 들판이 보이는 거실에서 아직도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먹는다면 함께 하는 사람이 그 누구라도 좋을 것 같다.
집에서 마당 왼쪽의 그늘막과 오른쪽의 평상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현무암을 깔아 맨발로도 갈 수 있게 하면 어떨까? 마당의 잔디가 초록으로 반짝일 수 있게 집터의 토양이 기름지기를 기도해야지.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벌써 전원주택을 다 지은 기분이다. 100명 중 99명이 말린다고 한들 계획이 이렇게 구체적인데 전원주택에 대한 꿈을 어떻게 접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직도 나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