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드라마 속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변해가는 인물들의 심리와 성격을 보면서 드라마 속에 나를 등장시켜 보기도 하고 감정이입을 하면서, 등장인물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어쩌면 그 눈물은 이야기에 몰입해서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지만, 궁극에는 나를 향한 눈물이지 않을까?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면서 친구들 간의 우정, 연인들 사이의 사랑, 가족과의 오랜 갈등과 화해, 그리고 못다 한 말들을 스토리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이 드라마는 감동적인 스토리에 유명 배우들의 명연기가 보태지면서 재미와 감동을 더해 주었고 품격 있는 드라마로 완성되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옥동(김혜자)과 동석(이병헌)의 이야기를 보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극 중에서 동석은 어린 자신을 두고 친구 아버지의 첩으로 간 어머니(옥동)를 원망하며 어머니와 남처럼 지낸다. 말기 암으로 어머니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동석은 어머니가 죽기 전에 ‘어머니는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을까?’를 꼭 물어보고 싶어 한다. 동석의 질문에 옥동은 끝내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지만 그녀의 마음은 동석에게 다른 방식으로 전해진다.
동석 의붓아버지의 제삿날 동석을 험담하는 의붓아들에게 옥동은 이렇게 말한다.
옥동: “첩살이에 종살이하는 엄마 보며 젊디 젊은 새끼가 너네들한테 나한테 칼 안 들고, 제 배 안 가르고 살아준 것 만도 고맙지, 왜 얘를 욕하는 거냐?”
그리고 ‘왜 나에게 미안한 것이 없냐?’는 동석의 원망에 옥동은 이렇게 대답한다.
동석: “뭐가 이렇게 당당해서 나한테 미안한 것이 없는 거야? 그땐 누이도 아버지도 죽고 나한테 엄마밖에 없었는데 나한테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그때 엄마는 나한테 마지막 하나뿐인 엄마마저 빼앗아 간 거야? 나한테 그래 놓고 어떻게 나한테 미안한 것이 없어?”
옥동 : “미친년이 어떻게 미안한 걸 알아? 너 엄마가 미친년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저는 바다에 들어가기 무서워하고 딸년을 물질을 시켜 쳐 죽이고. 그래도 살 거라고 아무나하고 부터 먹고. 그저 자식이 세 끼 밥만 먹으면 사는 줄 알고. 자식이 쳐 맞는 걸 보고도 멀뚱멀뚱. 개가 물어뜯어 죽일 년.”
옥동의 마음 속에 켜켜이 쌓이고 쌓인 ‘미안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무겁게 동석에게 전해진다. 옥동이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절절한 마음은 동석에게 가 닿는다. 때로는 ‘미안하다’는 말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이 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옥동이 그랬다.
옥동과 동석의 이야기를 보며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아버지께서는 영리하시고 근면절약시는 분이셨는데 절약이 지나쳐서 자식들 공부시키는 데까지 매우 인색하셨다. 언니들의 배움을 향한 열정을 꺾으셨고, 책가방을 들고 학교 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언니들의 마음을 헤아리시지 못했다. 응당 내야 할 등록금을 주실 때도 한 번에 주시는 적이 없었다. ‘준비해 뒀으니 걱정마라.’고 안심시켜 주신 적은 더더욱 없다. 끝내 주실 것을 마음 편하게 주시지 않고, 자식들이 늘 대문 근처를 서성이며 마음을 졸이게 하셨다. 학창시절 수학여행은 꿈도 꾸지 못 했다. 딸들이 결혼할 때도 아버지의 주머니에서는 돈 한 푼이 나오지 않았다. 성격이 괄괄하신 어머니는 늘 그런 아버지가 불만이셨고 두 분은 그런 일로 자주 다투셨다.
함께 나누고 싶은 말 ‘미안하다’
- 아버지와 나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면서부터 아버지의 그런 점이 나의 생활에 불편을 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잊고 살았다. 간혹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살아생전 씀씀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시면 ‘그 덕에 자식들이 알뜰살뜰 잘 살고 있는 것이니 감사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좋은 말로 둘러댔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나의 진심은 아니었다.자식들 교육에까지 인색하셨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많이 원망하며 살았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신다면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미안하지 않으시냐.’고 진심으로 여쭤보고 싶었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사셨던 것인지 아버지의 마음이, 생각이 알고 싶었다. 어머니의 진심을 알고 눈물을 흘리는 드라마 속 동석이 부러웠다.
옥동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죽은 어머니(옥동)를 안고 아들(동석)은 말한다.
‘사랑한다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내 어머니 강옥동 씨가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 한 사발을 끓여놓고 처음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셨다. 죽은 어머니를 안고 울며 나는 그제서야 알았다. 난 평생 어머니 이 사람을 미워했던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안고 화해하고 싶었다는 것을 나는 내 어머니를 이렇게 오래 안고 지금처럼 실컷 울고 싶었다는 것을.’
동석의 마지막 대사를 들으며 ‘어쩌면 내 마음도 동석의 마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식들 교육에 인색하셨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지울 수는 없지만, 더 마음 아픈 것은 아버지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한 번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생후 7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서 성장하다, 돈을 벌기 위해 대만과 일본으로 떠돌며 생활해야 했던 아버지, 고향에 돌아와 정착하기까지 아버지께서 겪으셨던 고달픈 인생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다.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의 절박했던 가난의 상처가 치유되셨기를 바라며, ‘미안한 마음’을 서로 전하고 싶다. 지금 우리 곁에 계시지 않지만 이 마음이 부디 아버지에게까지 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