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로하신 어머니께서는 작년부터 요양병원에 계신다. 코로나 환자가 다시 증가하면서 면회마저 불가능해진 요즘 겨우 전화로만 안부를 여쭙는데 어머니께서는 자주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신다. 좋은 추억들을 생각하시게 해 드리고 싶어 화제를 바꾸어 봐도 소용이 없을 때가 있다.
“항상 느그들한테 미안하고 또 미안타”
“엄마, 뭐가 그렇게 미안해요. 일곱 남매 힘들게 낳아 주고, 잘 키워 주신 엄마께 우리가 더 미안하지. 엄마가 잘 키워 주셔서 모두 잘 살고 있잖아요. 그런 엄마께 우리가 잘 못 해서 많이 미안해요.’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 미안코.”
“전 엄마가 잘해 주신 기억이 더 많은데 엄마는 자식들에게 뭐가 그렇게 미안하신 거예요?”
“미안한 것이 너무 많지. 항상 젖이 부족해서 충분히 못 먹인 것이 젤 미안치. 그리고 예닐곱 살 정도밖에 안 되는 어린 것들 농사일이며 김양식 하게 한 것도 미안코.”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잖아요.”
“항상 바빴응게 어서 해라, 바삐 해라 채근한 것도 미안하고, 느그 아부지가 돈을 다 쥐고 있어서 자식들 용돈 한 번 제대로 못 준 것도 미안하고, 딸들이 결혼할 때 ‘엄마, 50만 원만.’하는 것도 못 해 줘서 미안하고...”
“엄마, 그래도 지금은 다 잘 살고 있으니까 미안하다고 생각하실 것 하나 없어요. 엄마, 아버지께서 근검절약하시는 모습 보고 자라서 자식들이 모두 알뜰살뜰 살림도 잘하잖아요”
“그런가.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그럼요. 그러니까 다시는 미안하다는 생각 하지 마세요.”
“다른 건 몰라도 똑똑한 딸들이 그렇게 공부하고 싶어 했는데 공부 못 시켜준 건 말도 못 하게 미안하지…”
친구들이 학교 가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던 자식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억울하고,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들의 처지를 원망했을지 어머니는 다 알고 계신다. 그런 자식들을 지켜만 봐야 했던 어머니의 미안한 마음은 쌓이고 쌓여,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미안하다’를 되뇌고 되뇌어도 딱딱하게 굳어진 상처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방송통신고등학교와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니며 배움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는 딸들의 모습을 보며 대견함에 앞서 어머니는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던 것이다.
늘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가 안쓰럽기도 하고, 이제 그만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고 싶어서 그러지 마시라고 화도 내 보았지만 어머니의 미안한 마음은 끝이 없다. 그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는데 왜 그러시는 걸까?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많이 사랑한다.’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