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모니터를 향해 앉아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바빠 보였다. 방해가 될까 염려돼서 잠깐 망설였지만,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선생님, 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 앉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빈 의자를 끌어당겨 톡톡 쳤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어서 앉으라는 손신호를 보냈다.
“지금 한창 바쁘신 것 같은데, 급한 일 아니니까 전 나중에 다시 와도 돼요.”
“아니야,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차 마시면서 얘기할까?”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며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입이, 얼굴이, 어쩌면 그녀의 마음도 나를 향해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늘 이렇듯 한결같다. 언제나 진심이고 변함이 없다.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한참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학생이 찾아왔다. 나는 모니터에 시선을 꽂은 채 말했다.
“잠깐만, 나 이것만 마무리할게. 잠깐만 기다려 줘. 미안해.”
“선생님 바쁘시면 조금 있다가 올까요?”
“급하지 않으면 그래 줄 수 있어? 미안하지만 점심시간에 다시 오면 좋겠는데...”
여전히 컴퓨터 작업을 하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학생에게 말했다. 학생은 나의 뒤통수만 바라보다 간 것이다. 이런 나에게 사람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사람을 귀하게 대하는 한결같은 그녀의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선생님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아무리 바빠도 곧장 하던 일을 제쳐 두고 그 사람을 맞이하는데 어떻게 변함없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지 궁금해요.”
“음, 그 사람은 지금 나에게 오는 사람이어서 그렇지.”
선문답 같은 그녀의 대답이 돌아왔다. 왠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나에게 오는 사람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예요?”
“누군가가 지금 나를 찾아왔다면, 그는 지금 내가 필요한 사람이고, 그래서 나는 지금 그를 소중하고 귀하게 대해야 한다는 그런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할까?”
“선생님께서 몹시 바쁘실 때 제가 찾아갔었는데,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저를 바라봐 주셔서 정말 감동했었거든요.”
“아, 그랬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지금 당장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사람을 뒷전으로 하기가 쉬운데..."
"내가 교사로 일하면서부터 사람을 대할 때 그렇게 하려고 애썼던 것 같아. 학생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는데,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돌려보내고, 그다음에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상황은 이미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꼈어. 학생들은 이미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거나,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거나, 혹은 하고 싶은 얘기가 그때와 달라졌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오면 ‘그는 지금 나에게 오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만사를 제쳐 놓고 그를 맞이하지.”
그녀의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넘친다. 그녀를 가까이에서 지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의 바쁜 일상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녀의 방문을 두드린다. ‘지금 나에게 오는 사람’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와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동안 그들은 모두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가끔은 정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때 사람들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세요?”
“그 사람이 나에게 온 이유는 지금 이 순간 그 사람에게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한 시간 안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데, 누가 찾아오면 일처리가 늦어질 것 같다고 연락을 해서 양해를 구해. 일은 조금 늦게 처리해도 되지만, 그 사람 얘기를 들어주는 것은 지금이어야 하니까. 당장 불이 나서 꺼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일은 대체로 촌각을 다투지 않는 경우가 많아.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고 뒤로 보내도 되지만, 사람은 뒤로 보낼 수 없어. 여러 가지 일 중에서 사람을 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고 애쓰지. 그래서 일을 빨리 하거나, 일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아니면 잠잘 시간을 줄이면서까지 사람을 대하는 것은 나에게는 중요해.”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일은 감정이 없어서 변할 리 없지만. 사람의 감정과 정서는 변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 후에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오는 사람’을 귀하고 소중하게 대하고 기꺼이 내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을 우선시하고, 지금 이 순간 마주해야 할 사람을 뒤로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선생님을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요.”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하나하나 모두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오는 그 순간이, 내가 그들에게 필요한 순간인 거고. 누군가는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혹은 누군가는 자신을 인정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때로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이 필요해서 오는 경우도 있어. 나와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이 조금 더 소중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껴지고, 하는 일에 대한 용기를 좀 더 갖게 된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
“…”
“가족으로, 친구로, 동료로, 그리고 학생으로, 모두 다른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지. 이야기를 나누러 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잠시 쉬고 싶어서 나를 찾는 경우도 있어. 그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오든 그 사람들은 모두 귀하니까 진실되게 대하려고 최선을 다하지. 그리고 이야기 듣는 것을 미루지 않아. 미루다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의 본질을 잃게 되거나, 이야기의 내용이 쪼그라들어 그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바쁜데 굳이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겠지만, 나의 시간을 그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소명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진다. 방금 전까지 고민하고 걱정했던 것들도 그 무게를 덜고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