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월 나무 Sep 30. 2022

과거의 삶이 갖는 의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인간이 고통(시련)에 직면했을 때 무엇으로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까?


 육체적인 고통을 느낄 때 나는 네 살 무렵의 큰 아이의 미소를 떠올리는 습관이 있는데, 아마도 시작은 둘째 아이를 낳을 때부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던 날 아침부터 출산의 징조가 나타났다. 큰 아이를 돌봐 주시던 분께 연락을 드려 유치원이 끝난 후 아이를 돌봐 주십사고 부탁을 드렸다. 대충 집을 정리하고 점심을 먹은 후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병원에 도착해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입원을 하고 출산 준비를 하였다. 아마 오후 두 시 전후로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첫 아이 출산 때 겪었던 24시간 이상의 진통, 그리고 그중 8시간 정도의 극한 통증을 생각하며 아직 멀었다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큰 아이 때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주기적으로 진통이 찾아왔고, 그때마다 속으로 ‘아직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더 큰 진통이 있을 거야.’라며 마음을 다잡고 호흡을 조절했다. 그러는 동안 나도 모르게 큰 아이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고, 그러면서 깜빡 잠이 드는가 싶더니 진통도 스르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과정이 되풀이되다 심한 진통 없이 오후 다섯 시를 알리는 시보와 함께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3시간 정도의 진통은 큰 아이에 비하면 너무 수월해서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그 후로도 육체적인 고통이 있을 때 세 돌 반 무렵의 큰 아이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곤 하는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통증의 정도를 객관적 수치로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실제로 통증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는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심리적인 효과는 확실히 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육체적인 고통의 순간 나는 왜 큰 아이의 어릴 적 미소를 떠올리게 된 것일까? 아마도 둘째 아이를 출산할 즈음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첫째였을 것이고, 그 아이의 행복한 미소가 나에게 힘이 됐던 것이 아니었을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빅터 프랭클의 저서에서 저자는 극한의 수용소 생활을 견디게 해 준 하나의 예를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한겨울 새벽 동상으로 퉁퉁 부은 발에 젖은 구두를 신고, 큰 돌멩이를 넘고 커다란 웅덩이에 빠지면서 긴 행진을 한 후 작업장에 도착하여 꽁꽁 언 땅을 곡괭이로 파야 했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 허락 없이는 모자도 쓸 수 없었으며, 감시원들의 잔혹한 채찍과 고함 소리와 발길질이 이어지는 가운데 노역이 이어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 작업을 하던 중 옆의 누군가가 자신의 ‘아내’에 대해 속삭였고, 그 말을 듣고부터 저자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족감을 느꼈으며, 상상 속에서 그녀와 정신적 대화를 나누는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했던 것이다. 체력적으로 덜 건강한 사람이 수용서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과거의 삶이 갖는 의미


 우리는 흔히 미래의 잠재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간다. 그래서 지난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과거에 갇혀 있는 것이며, 진취적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힘든 일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힘을 얻곤 한다. 그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반추하고 그것으로부터 지금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잠재 가능성은 실현이 되는 순간 현실이 되고, 그것은 곧 과거로 옮겨간다. 내 과거 속에 있는 실체들에는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냈던 시련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나의 과거는 그 당시 나의 잠재 가능성을 나의 선택에 의해 실현시킨 실체이므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즉 내가 쌓아 온 과거의 실체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힘과 에너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여부는 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었듯이, 앞으로의 것도 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지난 일들을 많이 쓰게 된다. 과거는 실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좀 더 쉽게 글감이 될 수 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글을 쓰는 동안 과거의 소중한 사람이나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고 상세히 기록하면서 그 순간들을 다시 만나면서 느끼는 행복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아픈 상처이든, 행복한 순간이든 과거를 글에 담아내는 것은 의미 있고, 쓰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뜻하지 않은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나의 과거가 송두리째 사라진다면? 

 아무리 하찮은 과거라 할지라도 자신의 과거를 하얗게 지우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언제든 추억할 수 있고, 때로는 내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될 수 있는 나의 과거가 온전히 내 기억 속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의미 있게 다가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