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며 느낀 마음을 분석심리학으로 풀어 보다.
어스름한 저녁, 굴뚝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면 동네 어귀에는 엄마들의 "밥 먹어라" 하는 정겨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온종일 들과 산을 헤매던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처럼 아쉬워하며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시절 우리들은 딱지치기, 구슬치기, 술래잡기 같은 수많은 놀이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던 건 '그림자 밟기'였다. 찬란한 태양 빛 아래서 아이들의 그림자는 생동감 있게 춤을 추었고, 우리는 그림자를 밟히지 않으려, 혹은 친구의 그림자를 잡으려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나를 똑같이 따라 하는 그 검은 그림자가 재미있으면서도 묘하게 신비롭기도 했다.
가끔은 쫓아오는 동생들을 따돌리고 조금 더 먼 동산으로 올라가 무덤가에서 구르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 조금은 무섭기도 했지만 보랏빛 제비꽃과 이름 모를 노란 꽃들을 보며, 이 차가운 흙 아래 잠든 이도 한때는 저 꽃들처럼 고운 빛깔을 지닌 사람이었을까 상상하곤 했다. 죽음과 삶, 빛과 어둠이 동산에 함께 펼쳐 있었다.
거울 앞에 서면 나의 표정과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이지만, 때로는 윤곽만 보이는 검은 그림자가 거울 속 나보다 더 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림자 속에도 웃는 얼굴이 보이고, 꼬물거리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보인다. 짐을 이고 가는 엄마의 키를 훌쩍 커 보이게 만들고, 잠자리의 날개 짓도 꿈결처럼 느껴졌다. 그림자는 테두리만 보이는 단순함으로 존재하지만, 그 안에 개구장이 친구의 장난기와 엄마의 고단함도 묻어난다.
세월이 흘러 칼 융의 심리학을 통해 다시 만난 '그림자'는 가벼운 놀이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차마 '나'라고 인정하지 못해 무의식의 아래로 밀어내 버린, 나의 아프고도 못난 또 다른 모습이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착한 아이', '반듯한 어른'이라는 페르소나의 빛이 밝아질수록, 그 발끝 아래 그림자는 더욱 진한 색으로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고 싶어 화도 내지 못하고, 싫다는 말 한마디 못 한 채 보낸 시간들. 힘이 조금 생겼을 때 처음으로 "나 그거 하기 싫어"라고 내뱉었을 때 느꼈던 그 낯선 떨림을 기억한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 혹은 인정받지 못한 상처들은 무의식이라는 깊은 창고로 내려가 '내가 아닌 척' 숨어 지낸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통제할 수 없는 분노나 꿈속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나운 모습으로 불쑥 튀어나와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내 안의 그림자는 어떤 모습일까.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갈증, 사람을 옳고 그름으로 나누어 밀어내던 날카로운 잣대. 사실 우리의 생각이란 뇌의 해석일 뿐이고 감정은 호르몬의 작용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돌 하나 던지면 물 위에 퍼지다 사라지는 파문같은 허망한 것들임에도,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나'라고 믿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다.
칼융은 이 어두운 그림자를 떼어내야 할 혹이 아니라, 우리가 안고 가야 할 '온전한 나'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림자밟기 놀이에서 내 그림자를 떼어 놓고 달릴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내면의 어둠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전체가 된다.
이제 나는 내 안의 그림자를 없애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가만히 멈춰 서서 그 검은 모습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내 안의 눈부신 빛이 찬란하게 빛날 때, 어두운 그림자도 함께 머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그 소녀처럼, 이제는 내 안의 어둠과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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