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야기

어린 시절 연날기를 하며 배운 인생이야기

by 해온 정옥랑

연일 한파 특보가 울리고 영하의 날씨 속에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모자를 눌러써도, 머플러를 두르고 장갑을 껴도 파고드는 추위는 여전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마음 한구석에는 어린시절의 겨울 풍경이 떠 오릅니다.


< 문풍지 사이로 흐르던 겨울 >

나 어릴 적 시골의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매서웠습니다. 문풍지에 뚫린 작은 구멍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 소리는 낯설고 무서웠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막상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바람 소리는 잦아들고 세상은 평화롭기만 했습니다. 아랫목은 절절 끓었지만, 코끝이 시릴 정도로 웃풍이 세던 구들방. 커다란 이불 하나를 친구들과 함께 덮고 발을 꼼지락거리며 놀던 기억이 선합니다. 누군가 '무 방구'라도 뀌면 지독한 냄새가 난다며 서로 낄낄거리며 웃음꽃을 피웠지요. 고구마, 감자, 무 같은 자연의 먹거리를 나누어 먹으며 자란 우리도 참 그 자연을 닮아 있었습니다.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아 촌스러웠지만, 그때의 우리는 참으로 순수했습니다.


< 흰 눈 위에 새긴 우정과 스릴 >

흰 눈이 내리면 강아지처럼 신이 나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발자국을 찍었습니다. 강아지 발자국, 곰 발자국, 그리고 두 줄로 길게 이어진 기찻길 모양까지. 그러다 눈 위에 벌러덩 누워 내 몸 그대로의 모양을 찍어보기도 했습니다. 일어나서 바라본 눈 위의 자국은 마치 또 다른 내가 서 있는 것 같아 마냥 신기했습니다. 비탈진 언덕에 올라가 비료 푸대 하나 툭 깔고 앉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눈썰매가 되었습니다. '쓩' 하고 내려갈 때의 그 짜릿한 스릴은 놀이동산의 어떤 기구보다도 대단했지요. 논배미에 물이 얼면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썰매를 들고나갔습니다. 날은 무디고 쇠꼬챙이는 어설펐어도, 우리는 가장 행복한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 바람을 타는 법 >

겨울바람이 거세질수록 우리들의 손길은 바빠졌습니다. 대나무를 깎아 살을 만들고 창호지를 붙여 만든 투박한 연이었지만, 그 안에는 우리들의 커다란 꿈이 담겨 있었지요. 연실을 길게 늘어뜨리고 논둑을 냅다 달리면 어느덧 연은 "웅웅" 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구쳤습니다. 하늘 높이 뜬 연을 보며 줄을 '줬다 폈다' 할 때의 그 손맛! 너무 팽팽하게 당기면 줄이 툭 끊어져 버리고,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풀면 연은 맥없이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마음은 앞서는데 바람이 도와주지 않아 연이 추락할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습니다. 연줄이 끊겨 멀리 날아가 버리는 날에는, 아득해지는 연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서 허탈한 마음을 달래곤 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우리 삶도 그 연날리기와 참 닮아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바람을 탈 때도 너무 욕심내어 당겨서도, 그렇다고 아주 놓아버려도 안 됩니다. '적당한 거리'와 '완급 조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까지는 숨이 턱에 차도록 무한 반복해서 달려야 합니다. 일단 날아오른 뒤에는 예기치 못한 돌풍에 줄을 놓치지 않게 온 마음을 다해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또 연을 내릴 때조차 엉뚱한 나뭇가지에 걸려 상처 입지 않도록 주변을 살피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비로소 깊이 깨닫습니다.


눈이 언제쯤 오려나요? 눈이 내리면 이른 아침 일어나 제일 먼저 발자국을 찍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손녀의 손을 꼭 잡고 뽀드득 소리를 내며 함께 걷고 싶습니다. 겨울은 매섭게 추워도 그 안의 추억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속에서는 벌써 따뜻한 봄이 오고 있습니다.


출처 : 픽사베이


작가의 이전글 도깨비 방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