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더 빛나게 해주는 훌륭한 스승 나의 손녀
어느 여름날에 있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비 내리는 아침 창밖에는 빗줄기가 굵어지는데, 학교에 갈 시간은 다가와 마음이 급해집니다. "에구, 오늘은 무얼 신고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장화를 신고 가라던 아이 엄마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운동화를 고집하는 손녀를 달래어 부랴부랴 검은 장화를 신겼습니다. 우산을 받쳐 들고 나선 등굣길, 빗물에 젖은 길 위로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장화가 너무 큰 탓인지, 아니면 빗물을 머금어 무거워진 탓인지 아이의 걸음은 자꾸만 처집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속상했는지, 손녀는 걷는 내내 입술을 내밀고 짜증을 냅니다. 제가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우리 날개를 펴고 빨리 날아가 볼까?" 그러자 아이가 툭 던지듯 대답합니다. "난 지금 짜증을 내서 천사가 아니야. 그래서 날개도 없어." 그 말에 빙그레 웃음이 났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기특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의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해 주었습니다. "아니야, 넌 지금 '짜증을 내는 천사'인걸. 가끔은 말 안 듣는 천사가 되기도 하고, 심술난 천사가 되기도 하지.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 안에는 항상 천사가 있단다." 그 한마디에 아이의 얼굴이 마치 구름 사이로 비친 햇살처럼 환해집니다. '짜증을 내는 나'조차도 여전히 천사라는 것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제대로 알 때,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요. 인간에게는 누구나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공간에 선 하나를 긋는 순간 '안'과 '밖'이 생기고 단단한 '벽'이 만들어집니다. 천사와 악마,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이분법적인 잣대로 편을 가르고 경계를 긋곤 합니다. 가만히 자연을 바라봅니다. 저 넓은 하늘과 바람, 그리고 바다에 무슨 경계선이 있을까요? 태양이 어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빛을 주던가요?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 있고, '예쁜 사람'과 '볼수록 매력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예순여덟 해를 살며 깨달은 것은, 삶에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좋고 나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모든 것이 어우러진 커다란 한판의 삶일 뿐이지요. "전체를 볼 줄 알아야 진짜 나를 만나게 된다" 는 말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 갑니다.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시켜 주는 소중한 친구이자, 나의 삶을 더 빛나게 해주는 훌륭한 스승인 나의 손녀. "넌 존재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소중하단다. 할머니에게 와 주어서 정말 고마워, 사랑해 " 비가 그친 하늘 너머로, 장화를 신은 작은 천사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