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기적’을 믿었다.
수면 교육이라는 혹독한 의식을 치른 끝에 얻어낸
아들의 10시간 통잠은
고단한 아버지의 삶에 허락된 유일한 안식이었다.
하지만 평화는 짧았다.
4개월 차에 접어들자 거짓말처럼
‘잠 퇴행기’가 찾아왔다.
1시간마다 깨어 울부짖는 아이를 안고
거실을 서성이는 새벽, 나는 당혹감에 빠졌다.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왜 우리는 다시 이 지독한 과거로 돌아왔는가.
하지만 이 뒷걸음질의 실체는 사실 ‘급성장기’다.
아이의 뇌가 폭발적으로 발달하기 위해
기존의 수면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는 과정,
즉 성장을 위한 필연적인 퇴행이다.
아들을 어깨에 메고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켜 뉴스를 검색하던 중,
나는 또 다른 거대한 퇴행과 마주했다.
중국 바이트댄스가 공개한 영상 생성 AI,
‘시댄스 2.0(Seedance 2.0)’의 등장이었다.
시댄스 2.0이 보여준 영상미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텍스트 몇 줄로 할리우드의 전유물이었던
복잡한 물리 법칙과 질감을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이 기술은
영화업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이 찬란한 진보의 이면에는
지독한 ‘윤리적 퇴행’이 도사리고 있었다.
수많은 창작자가 평생을 바쳐 쌓아온 저작권과
노동의 가치를 무단으로 흡수하고
약탈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자라기 위해 부모의 수면을 파괴하듯,
AI는 기술적 성장을 위해 인류가 쌓아온 저작권이라는
울타리와 창작의 상도를 무참히 짓밟았다.
누군가의 고통을 땔감 삼아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도구(진보)를 내놓은 이 비정한 논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할리우드의 스튜디오와
전 세계 창작자들의 책상을 뒤흔들고 있다.
이것이 옳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누군가의 피땀 어린 데이터를 무단으로 학습해
얻어낸 결과물이 공정할 리 없다.
하지만 비정한 현실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거대 자본과 플랫폼은 효율성이라는
독배를 기꺼이 마시기로 결정했다.
선악의 칸막이가 무너진 자리에는
오직 ‘결과물’이라는 냉혹한 질서만 남았다.
우리 같은 소시민 창작자들에게
이 판도는 지나치게 불공정하다.
하지만 아기에게 “제발 예전처럼 잠들어달라”고
빌어봐야 소용없듯,
기술의 진보를 멈추라고 외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세상의 관성은 이미 저만치 달려 나갔고,
우리는 그 파도 앞에 홀로 남겨졌다.
억울함과 수치심을 삼키며
우리가 직시해야 할 사실은 단 하나다.
이미 빛은 켜졌고,
그 빛은 우리를 삼킬 듯 눈부시다는 점이다.
너무 밝은 빛은 때로 눈을 멀게 하지만,
어둠 속에 남겨진 자는 결국 도태된다.
기술의 탄생 배경이
비윤리적이고 과정이 불공정할지라도,
그것이 이미 세상을 비추는
거대한 질서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 ‘비정한 빛’ 안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서 눈을 부릅뜨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소시민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자 생존법이다.
약탈로 빚어진 도구라 할지라도
그것을 장악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가치’를 덧입혀야 한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창작자의 고유한 시선과
기획을 이 비정한 기술에 태워,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 한다.
아들의 잠 퇴행기가 결국 성장을 향한 아픈 과정이듯,
이 혼란스러운 시대 또한
우리가 마주해야 할 거대한 성장통일지 모른다.
좋건 싫건, 빛을 보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우리는 냉소보다는 가치 창출의 치열함을 택해야 한다.
그 눈먼 빛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아내는 것만이,
이 불공정한 게임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