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2026년 2월,
캐나다의 작은 마을 텀블러리지를 피로 물들인 소식은
평온했던 나의 일상에 균열을 냈다.
피의자 제시 반 루트셀라가
범행 전 챗GPT와 함께
총기난사 시나리오를 짰다는 보도를 보며
나는 한동안 모니터를 끄지 못했다.
아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뉴스가 아니었다.
‘혹시 내 아이가 이런 무차별적인
비극의 피해자가 되지는 않을까?’라는
서늘한 공포가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하지만 동시에 더 지독한 공포가 나를 덮쳤다.
‘아니면 그 반대로,
내 아이가 저 차가운 모니터 앞에서
뒤틀린 의지를 다지는 가해자가 된다면?’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보다,
내 아이가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부모의 심장을 더 깊게 도려냈다.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 AI 규제를 외친다.
AI가 범죄 징후를 더 일찍 포착했어야 한다고,
대화 내용이 즉각 공권력에 전달되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냉정하게 묻고 싶다.
펜을 꺾는다고 칼을 휘두르려는 자의 의지가 사라지는가?
범죄를 결심한 이에게 AI는 수만 가지 경로 중 하나일 뿐이다.
챗GPT가 입을 다물었다면
그는 다크웹의 음성적인 포럼을 뒤졌을 것이고,
로블록스의 살상 시나리오에 더 깊이 탐닉했을 것이다.
AI를 규제하는 것은 범죄의 ‘방법’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 뿐,
인간의 내면에서 이미 완성된 ‘살의’를 꺾지 못한다.
거울을 가린다고 해서 그 앞에 선
일그러진 얼굴이 바뀌지 않듯이,
도구에 족쇄를 채우는 것은
정작 직시해야 할 인간의 본성을 외면하려는 비겁한 회피다.
우리는 왜 이토록 규제에 집착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불확실성’이라는
세계의 본질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난 이상,
이미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세계로 내던져진 존재다.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될 가능성,
혹은 가해자가 될 가능성은 그 불확실한 세계의 일부다.
두렵다고 해서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시스템의 감시 아래 스스로를 가두는 것은,
안전을 얻는 대가로 인간의 영혼을 감옥에 집어넣는 행위다.
감옥 안에서는 다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곳에는 빛도, 성장도, 자유도 없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불확실한 가능성 때문에
스스로를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여
더 확실하고 밝은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고자 하는 의지다.
결국 교육과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의 손에서 AI라는 도구를 뺏는 것이 아니다.
그 도구를 쥔 손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신의 자유를 책임질 줄 아는 ‘단단한 자아’를 길러주는 것이다.
규제의 그물망을 촘촘히 짤 시간에,
우리는 한 인간이 왜 고립되고 비틀리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기술이 신의 영역을 넘볼 만큼 진화하더라도,
세계는 여전히 불확실할 것이다.
나는 내 아들이 살아갈 세상이
100% 안전한 무균실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대신, 어떤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찾아낼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기를 바란다.
차가운 창살을 부여잡고 떨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창 너머로 비치는 빛을 향해 당당히 걸어 나갔으면 한다.
불확실성을 통제하려 들기보다
그 파도를 타고 넘는 법을 배우는 것.
이 혼돈의 시대를 건너가는 소시민 창작자이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라는 작은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