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을 견디며 찍은 흉한 마침표
최근 AI 영화제 출품을 위한 단편 영화 작업을 마무리했다.
아직 결과가 나오기도 전이지만,
나는 패배를 직감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작품이 ‘망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창작자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대중의 비판을 받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 공들여 만든 쓰레기를 마주했을 때다.
원인은 오만이었다.
“시나리오가 전부다”라며 기초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
스승님의 가르침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는 5분 남짓한 짧은 길이를 핑계로 설계를 생략했다.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다 있다는 착각,
그리고 무엇보다 AI가 내놓는 매끄러운 이미지들이
나의 빈틈을 메워줄 것이라는 과신이 나를 눈 멀게 했다.
AI가 뱉어내는 화려한 영상미에 취해 항해를 시작했지만,
이야기의 뼈대가 무너지고 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미 투입된 시간과 비용,
그리고 끝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괴롭혔다.
아예 영화를 엎어버리고 이 수치심에서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수상 가능성 0%인 이 ‘못난 자식’을 끝까지 완성해
세상에 내보낼 것인가. 시간과 돈은 이미 날아갔고,
남은 것은 완성에 따르는 고통뿐이었다.
나는 결국 지독한 자괴감을 견디며 그 흉한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자전거는 글로 배울 수 없다
이 지옥 같은 완주의 기로에서
나를 붙든 것은 일론 머스크의 한 마디였다.
"물리학은 쉽다. 하지만 엔지니어링은 지옥이다."
(The physics is the easy part. The engineering is the hard part.)
머스크에게 ‘물리학’이란 이론적인 정답을 의미한다.
책을 보고 로켓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
즉 시뮬레이션상에서 완벽한 수치를 뽑아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도면을 들고 실제 현장에서 기계를 만지며
로켓을 쏘아 올리는
‘엔지니어링’의 단계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실에는 이론이 계산하지 못한
수만 가지의 변수와 마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AI가 우리에게 주는 정답은 머스크가 말한 ‘물리학’과 같다.
클릭 몇 번으로 뽑아낸 매끄러운 이미지와 줄거리는
화면 속에서만 완벽할 뿐이다.
머스크가 로켓을 쏘아 올릴 때 시뮬레이션보다
실제 발사대에서 터져나가는 폭발 데이터를
훨씬 고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화염 속에서 로켓이 부서지는 그 처참한 순간만이,
이론이 가르쳐주지 않는 진짜 문제점을
정직하게 폭로하기 때문이다.
나의 실패한 영화는
바로 발사대 위에서 터져버린 나의 첫 번째 로켓이었다.
생각없이 AI에만 의존했다가
현실의 마찰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 셈이다.
하지만 이 폭발의 현장을 끝까지 지켜보며
수습하는 지옥 같은 과정만이,
다음 로켓을 궤도에 올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될 것이다.
실패를 외면하는 사람들
문제는 세상이 점점
이 비릿한 폭발의 현장을 외면하려 한다는 점이다.
실패를 수습하는 고통 대신,
모두가 AI가 내놓는 정답(평균치)에
의존하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클릭 몇 번으로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만,
역설적으로 그 매끄러움은 개성을 지워버린다.
이런 세상에서
직접 부딪혀 무릎이 깨져본 사람만이 얻는 데이터는
알고리즘이 결코 학습할 수 없는
나만의 비공개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망해가는 영화를 수습하며 느꼈던 자괴감과 고민은,
다음 작품에서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내는 내면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실패를 끝까지 완성하는 과정은
그 누구도 청강할 수 없고
오직 나만이 듣는 ‘단 한 사람을 위한 비밀 수업’이다.
우리가 지불하는 수치심과 시간은
‘독보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치르는 가장 정직한 수업료다.
나 홀로 듣는 이 고통스러운 수업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자전거에서 직접 넘어져 본 사람의
균형감각까지 훔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 내가 찍은 이 흉한 마침표는 결코 헛되지 않다.
이 실패의 경로는 내 몸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다음 항해에서는 나를 절대 같은 지점에서
침몰하지 않게 할 것이다.
비틀거려본 자만이 핸들을 똑바로 잡을 수 있듯이,
오늘의 이 못난 작품은 나를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남다른 존재로 만드는
가장 단단한 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계속해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