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노트 Sep 10. 2023

세상에 이런 일이!(30년 만의 재회)


이번주 수요일 오후, 저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글을 적는 지금도 그때의 놀람과 감동이 떠오르는데요,



그날 오전 병원진료가 있어 오전만 휴가를 냈어요. 사실 병원에서 교육원까지 1시간 반 거리라 그냥 하루 휴가를 낼까 했는데, 오후에 글쓰기 수업이 있어 그럴 수가 없었지요. 마치 저를 위해 준비한 수업처럼 느껴져, 어떻게 담당자가 이런 수업을 설계했는지 찾아가서 인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가까스로 1시에 도착해 늘 앉던 두 번째 자리에 앉아서 어떤 분인지 강사님을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중후한 회색빛 머리칼에 인상이 참 따뜻한 환갑 즈음의 중년으로 보였지요. 졸리는 1시부터 5시까지 4시간의 글쓰기 수업이니 사실 저처럼 관심이 있는 사람 외에는 딱 졸거나 딴짓하기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수업이 시작되자 강사님은 연신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역사적 사실과 과학적 증명을 통해 설명해 주셨어요. 세종대왕이 위대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천재였다는 사실에 얼마나 자랑스럽던지요.  


서사문 쓰는 법




그런데, 

수업 시작 10여 분쯤 흐르자, 그 강사님의 목소리와 얼굴 표정, 몸짓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었어요. 


'어디서 봤지? 예전 같은 곳에서 근무했나??'


저처럼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기억 못 하는 사람이 이 정도 느낌이면 분명히 제가 아는 사람이 맞는다고 확신했어요. 강사님의 이름을 다시 찾아보니,


'사직고 국어교사 구자행'


'어, 현직 고등학교 국어쌤?  아.. 구자행..?  구자행...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만났지?'


바로 그때,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풋풋하고 잘생긴 젊은 총각 선생님이 우리 고등학교로 부임해 오셔서 국어를 가르치던 한 장면!


' 어머나...   구자행 선생님..!!!'


저는 그때부터 가슴이 콩닥거리고, 감격에 젖어 표정관리를 할 수가 없었어요. 삼십 년이나 지났지만 확실히 그때의 얼굴과 표정이 보였습니다. 


'아, 정말 점잖게 나이 드셨구나.. 이제 정년이 2년 밖에 남지 않았다니.. 하기야 내 나이가 낼모레 50이니..'


'나중에 쉬는 시간에 가서 인사할까? 아님 수업 다 마치고 조용히 가서 인사를 드릴까?' 혼자 온갖 생각을 하며, 옆에 앉은 짝꿍에게


"저분 아무래도 나 고등학교 국어쌤 인 것 같아"  하니 덩달아 눈이 똥그래지며 놀랐어요.


마침 그때, 선생님께서 무슨 질문을 하셨는데(사실 오만가지 생각들로 무슨 질문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요^^;) 한두 명이 대답을 했고, 한 명만 더 얘기해 보자며 절간처럼 조용한 강의실을 간절한 눈빛으로 훑어보셨습니다. 바로 그때, 소심한데 정의로운 제가 용기 내어 손을 들었습니다. 사실 질문이 뭔지도 몰랐기에 정답을 말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직접 확인이 하고 싶었지요.


"저.. 강사님..  혹시 90년도에 00여고에 근무하시지 않았나요? 


"아, 네 맞아요~"


"아.. 저.. 선생님 안녕하세요, 처음엔 몰라뵀는데 저 고등학교 때 국어 가르쳐 주셨어요"


순간 강의실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고 몇몇은 박수를 쳐 주었지요.


"아~ 그래요? 내가 00여고에 6년이나 근무했었는데 그때 학생이었군요. 반가워요. 이것도 인연인데 악수나 한 번 합시다" 하시며 제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미셨어요.


저는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선생님의 손을 잡고 깍듯이 인사를 하는데 갑자기 감정이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느꼈습니다. 손을 떼자마자 자리에 앉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남이 볼까 봐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대책 없이 눈물이 쏟아졌고, 옆에 짝지가 


"어머~ 우는 거예요?"


하며 저를 다독이자 교실이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내게 다가와서는,


'아, 이런 신기한 일도 다 있고~ 울지 마세요!' 하며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셨어요. 


다시 한번 70명이나 되는 교육생들의 응원의 박수를 받고 저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TV는 사랑을 싣고'를 찍었습니다. 거기엔 눈물이 빠질 수 없으니 제가 제대로 했지요? ^^ 


현직 국어교사가 어떤 이력이 있길래 그 많은 강사들 중에 오늘 교육을 하게 되었을까 궁금하던 차에, 이력을 잠시 소개해 주셨어요.






       


        국어 시간에 소설 써 봤니? + 국어 시간에 시 써 봤니? 세트저자구자행출판양철북발매2021.06.28.




선생님은 반 아이들과 항상 글쓰기 수업을 하셨고, 그 기록들을 교정에 전시하고, 문집으로 엮고, 그걸 또 책으로 여러 권 펴 내셨더라고요. 그러기를 30년 꾸준히 하셨지요. 


선생님의 글쓰기 스승이었던 '이오덕' 선생에 대한 말씀도  <한국 글쓰기 교육연구회> 회장님도 지내실 만큼 글쓰기의 대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서사문과 시 쓰는 법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아이들이 써 낸 그동안의 산문과 시를 소개해 주셨는데요, 얼마나 기발하고 감동적인지 수업 내내 아이들의 글만 읽고 싶었어요. 


그중에  몇 편을 소개해 봅니다. 



제목 : 피곤해


                                      00여고 1학년 김0조




야자를 마치고 집에 가서 씻고 누웠다.


잠시 눈 한 번 감았다가 떴는데 아침이다.


기절했다 깬 것 같다.    (2010.5.3.)




제목 : 내 짝지  보미


                                      00여고 2학년 우혜림




뒤에서 부스럭 소리가 난다.


수요일 보충시간 마치기 15분 전


내 짝지 보미는 변신을 시작한다.


니 남자 만나러 가나? 물으니


필라테스 하러 간댄다.


근데 난 필라테스가  뭔지 잘 몰라서


그냥 아는 척 했다   (2018.5.14.)




제목 : 내 짝지  혜림이


                                      00여고 2학년 박보미




내 짝지 혜림이는 눈썹이 생명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생얼에 눈썹을 그리고 왔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뒤쪽 거울로 가서 고치고 온다.


"내 눈썹 아까보다 괜찮제?"


"어. 완전!"


사실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2018.5.14.)





제목 : 언행불일치


                                      00고 1학년 한0호




시험을 갈았다 심하게


엄마한테 말하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엄마가 한 말이 기억났다.


"시험 성적이 낮아도 당당하게 살아라."


나는 당당하게


엄마한테 시험 성적을 말했다.


의외로 엄마가 웃음을 띄며


"괜찮아, 다음에 잘 치면 되지."


이 말이 끝나는 순간


엄마는 단소를 들었다.    (2011.5.13.)






제목 : 끝까지 들으세요 선생님


                                      00고 1학년 김0경




거기 너, 넌 꿈이 뭐지?


깐깐한 선생님의 말에


순간 고민한다.


그러자


그 몇 초를 못 참고 기다렸다는 듯 던지는


선생님의 한마디


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 네 진로도 결정 못 했니?


날카롭게 퍼지는 잔소리


하지만 선생님


제가 고민한 그 몇 초는


없는 꿈을 만들어 내는 시간이 아니라,


제가 가진 수많은 꿈 중 뭘 꺼내 보여야 할까


고민한 시간입니다.      (2012.7.30.)



    02:02

이 밖에도 아이들이 지은 시와 산문의 낭독을 통해 쓰기 기법을 설명해 주셨는데, 내용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솔직한지, 거기다 선생님의 맛깔난 낭독도 일품이었어요. 


그렇게 마지막 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종이 2장씩을 내어 주시며,

'미안함'을 주제로 한 시를 한편 적어보라고 하셨어요. 처음엔 다들 힘들어했지만 곧 강의실은 창작의 고요함으로 예전 국어 글짓기 시간으로 돌아간 듯 했습니다. 


선생님은 숙제로 내진 않을 테니 꼭 완성해 보라고 농담을 건네시고는 긴 강의를 마치셨어요.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저는 얼른 뒤따라 나가 꼭 다시 뵙고 싶다며 인사하고 감사함을 전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오늘 수업 시간 순간순간, 그 시절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얼마나 만감이 교차했는지 몰라요. 적지 않은 나이인 저에게 존대하시는 걸 보며, 지나간 시절에 서글퍼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뵙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아이들 글을 통해 내 아이들의 마음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됐고요. 꼭 한번 다시 뵙고 싶습니다. 


우리 국어쌤, 구자행 선생님!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


제자 올림


우리 고등학교 국어쌤과 함께 ^^



아래 영상들 꼭 한번 보세요~ 웃다가 울다가 ^^



:00                  02:39

















선생님의 글쓰기 철학!









작가의 이전글 별에서 온 내 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