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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들 May 23. 2021

#6 예비 시월드 탐방




 미국에서의 2주는 생각보다 너무나 평온했다. 평온하다못해 내 집보다 편안했다.

 그의 어머니는 지역에서 꽤 유명한 퀼트 아티스트였는데 발목에 실과 바늘의 타투가 있을 정도로 힙한 분이셨다. 아무 일 안하고 놀고 먹는 것이 송구스러워 집안일을 도우려고 해도 그녀는 펄쩍 뛰며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기계 엔지니어였고 장난기가 넘치는 성격이었다. 나는 누가 엔지니어 아니랄까봐 자동차에 관심도 없는 나를 굳이 차고로 데려가 본인이 수리한 자동차를 하나 하나 보여주고 설명을 하곤 했다. 나는 그냥 적당히 wow, awesome, cool을 연발하였다.


 그들에게는 툴루스라는 뚱냥이가 있었다. 목덜미에 털이 덮수룩한 시베리아숲 고양이 툴루스는 두둑한 뱃살 탓에 뛰지는 못하고 사부작 사부작  안을 돌아다니며 노란 털을 휘날리는 마스코트였다.


 부모님은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만 같이 식사를 했는데 매일 저녁 핫한 펍을 찾아 우리를 데려가 주셨다. 같이 버거와 수제 맥주를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예비 시부모님이라기보다는 그냥 나이가 좀 많은 외국인 친구처럼 느껴졌다. 두 분은 한국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서 나에게 질문을 쏟아냈는데 그것은 예기치 못하게 나의 무지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남친 아빠 : 한국에는 산이 많니?

나 : 네!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예요.

남친 아빠  : 어떤 산이 가장 높지?

나 : 백두산이라고 북한이랑 중국 경계에 있는 산이예요! (여기까지는 껌이지)

남친 아빠 : 그건 높이가 어느 정도 되니?

나 : 어...(한라산이 2,000m니까 백두산이 두 배는 되겠지) 4,000m 정도요!!




백두산의 높이는 약 2,700m다.




남친 아빠 : 한국은 언제부터 민주주의 국가였니?

나 : (광주 민주화 항쟁이 1980년이었으니까) 1980년이요!



우리나라는 1948년부터 이미 민주국가였다.




 나도 나름 고등교육을 받은 인간인데 이것밖에 안됐었나 싶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외국인과 만나려면 상대방 나라에 대한 공부 못지않게 내 나라에 대한 공부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역대 대통령 이름부터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여서인지 이 지역에는 고층건물이 거의 없었다. 복닥복닥한 서울에서만 살았던지라 탁 트인 하늘을 보니 조였던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아예 이 곳에 눌러앉아 살고 싶을 정도였다.


  2층을 넘어가는 건물이 없었고 멀리 멀리 떨어져 지어 있어서 모두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심지어 KFC도 널찍한 땅에 세워진 1층짜리 건물에서 나홀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서울이라면 저 땅에 벽면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간판이 빽빽하게 붙은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을 텐데... 건물의 한 칸을 겨우 차지하고 있을 KFC가 땅덩이가 넓은 이 곳에선 이렇게 호사를 누리고 있구나. 도시 전체가 넓고 여유롭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렇게 평화로운 도시를 놔두고 왜 서울처럼 정신없는 도시에 온 걸까? 남자 친구가 이해되지 않았다.


 동네 자체도 넓은 도로를 끼고 주택들이 널찍널찍하게 떨어져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각양각색의 주택과 집주인의 취향대로 꾸민 정원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느 날 남친과 동네 산책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커다란 개와 산책하는 한 여자가 걸어왔다.



여자 : Hello~

남친 : Hi~

(여자가 지나간 후)


나 : 아는 사람이야?

남친 : 아니. 몰라.

나 : 아. 역시 미국 사람들은 모르는 사이라도 만나면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구나.

남친 : 너 미국 사람들이 만나면 왜 서로 인사하는지 알아?

나 : 아니, 몰라.

남친 :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야. 워낙 사람이 없으니 사람이 나타나면 반가워서 ‘어! 사람이다!’하고 인사하는 거지. ㅋㅋㅋ

나 : 아~ㅋㅋㅋ

남친 : 생각해봐. 서울에선 만나는 사람마다 다 인사할려면 Hi, Hi, Hi, Hi, Hi, 계속 인사만 하다 하루가 다 갈 걸 ㅋ

나 : 그렇네 ㅋㅋㅋ

남친 : 그래도 난 서울이 좋아. 재밌잖아. 이 동네는 너무 심심해. 편의점도 없고. 밤에 치킨도 시켜먹을 수 없잖아!


     니가 호강에 겨워 요강에 응가를 하는구나...!

    치킨은 그냥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되지!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그저 서로가 갖지 못했던 것을 원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 복잡한 서울에서 30년 넘게 살다보니 이 곳이 좋아 보이는 것일 뿐 이 곳에서 나고 자랐으면 복잡한 서울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이 넓은 동네에 걷고 있는 사람이 우리들밖에 없다. 아까 그 여자도 30분 만에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서울에 사는 우리의 마음이 삭막한 것이 면적 대비 인구가 너무 많아서라는걸 깨달으니 조금 서글퍼졌다. 한국사람들도 좀 널찍한 공간이 주어지면 서로 살갑게 인사하면서 지낼 수 있을까? 암튼 미국은 땅덩이는 넓고 사람은 없는, 참 신기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롭고 잉여로운 2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공항에 도착해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고 공항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남자 친구의 엄마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 친구의 아빠는 작별인사를 하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You’re amazing!”


 내가 어메이징 하다고? 난 그냥 2주 동안 빌붙어서 놀고먹은 것밖에 없는데... 반어법은 아니겠지? 하하.


 남들은 시월드의 ‘시’ 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던데. 다행히 나는 시월드 복은 있는 것 같다. 집보다 편했던 예비 시월드 탐방은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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