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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들 May 30. 2021

#7 동거

It was bearable.



“그럼 이 참에 같이 사는 거 어때?”

사귄 지 1년이 지나가던 무렵이었다. 자취하던 집의 계약이 만료되어 이사를 알아보는 나에게 그는 동거를 제안했다. 서로 부모님도 만나 뵀고 결혼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 사람이 내 평생의 반려자로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100% 확신이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적어도 그와 두 번의 봄은 지내본 후에 결혼을 결정하고 싶었다.


당시 그와 나는 각각 월세 50만 원짜리 원룸에 살고 있었는데 관리비에 공과금까지 합치면 한 달에 100만 원 남짓을 지출하는 셈이었다. 1년이면 1,200만원. 사실 월세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처럼 좁은 원룸 2개에 따로 따로 살기 위해 100만원을 낼 바에는 100만원짜리 투룸을 구해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주거비도 줄고 밖에서 데이트하는 비용도 절약이 되며 결혼 전에 서로의 라이프 스타일을 맞춰볼 수도 있으니 혼전동거는 1석 3조의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반(?)전제로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엔 그의 직장에서 가까운 동네로 알아보다 엄청난 집값에 놀라 서울의 변두리로 변두리로 나오다 보니 우리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은평구라는 동네까지 오게 되었다.


우리가 계약한 집은 보증금 3,000 월세 50. 관리비가 5만원인 투룸이었다. 평수가 크지는 않지만 10 건물의 제일 위층이라 저멀리 보이는 경치가 기가 막혔다. 집을 보러 가던 , 거실 창문을  열어젖히며 ‘봄이 오면  멀리 보이는 하천을 따라 벚꽃길이 여요’라 세입자의 말에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약을 해버렸다.


아무것도 없는 투룸이라 우리는 침대와 냉장고, TV와 드럼 세탁기를 구입했다. 우리는 매일 이 침대에서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날 것이다. 옷도 한 세탁기에 돌리고 그릇도 함께 공유할 것이다.


전입신고를 하고 그를 ‘동거인으로 등록하니 한글로 적은 그의 영어 이름이  주민등록등본에 같이 찍혀 나왔다.  이름은 항상 아빠 밑에 있거나  혼자뿐였는데 남자이름과 함께 인쇄된 주민등록등본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원룸에서 5, 셰어하우스에서 1, 도합 6년을 혼자  자취러고, 그는 이역만리 타지인 한국에서 6년째 홀로 살고 있는 외국인 자취러였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기쁨이  컸다.


집에 들어갔을 때 반겨주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와 한 침대에서 자야 된다는 사실이
답답하기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외로움이 느껴질라 치면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그에게 가서    껴안으면 마음이 따땃해졌다.


함께 살게  덕에 주거비는 절반으로 줄었고 신기하게 식비도 줄어들었다. 혼자 살 땐 주로 배달음식이나 외식을 하다가 같이 살게 되니 요리를 더 많이 하게 됐다. 혼자   먹는 것도 치우는 것도 설거지를 하는 것도 모두 오롯이  몫이었다. 이 냄비, 저 냄비 써가면서 요리를 하고난 뒤 싱크대에 쌓인 접시를 보면 ‘내가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짓을 하나’ 싶어 자연스럽게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다(배달음식을 먹으면 끼니당  원은 우습게 사라진다). 제는 내가 요리하면 그가 설거지하고 그가 요리하면 내가 설거지를 하니  일이 절반이었다.  번에 2인분을 요리하니 재료금방 금방 소진야채가 물러서 버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자연스레 야채나 과일같은 신선식품을 많이 구매하고 섭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거에도  좋은 점은 있었다.


바로 맨얼굴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평소 화장을 진하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눈썹없는 진짜 맨얼굴만큼은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마지막 자존심이랄까. 다행히 나는 그보다 부지런해서(?) 늦게 자고 먼저 일어나는 생활패턴을 가지고 었다. 그가   화장을 지우고 그가 일어나기 전에 화장을 해서 근근이 자존심을 지켜가던 어느 날이었다. 세상 모르게 잠을 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눈을 뜨니 그가 어느샌가 일어나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있고 잔털 하나, 모공 하나도 다 보일 정도로 방 안은 환한 상태였다.  에 흐르는 촉촉한 침이 느껴졌다.

난 ‘ 이제 끝났구나’ 생각했다.


나 : 쓰으으읍!!(흐른 침 닦는 중) 뭐.. 뭐야!!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어!!!?


남편 : 매일 이렇게  옆에서 눈뜰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말로  표현 못하겠어. (영어로 말함)


? 갑자기? 거짓말하지 말라며 이불을 뒤집어 썼지만 아마도 그 순간이 남편과의 결혼을 결심한 순간이었던 것같다. 침흘린 맨얼굴을 봐도 행복하다는데   바라겠는가. 그렇게 우리의 동거생활은 아무런 트러블없이 평화로웠다.


중국발 폐렴 뉴스가 나오기 전까지는.


어느 날부터인가 뉴스를 통해 중국에서 정체불명의 폐렴 환자가 나오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국제 소식이겠거니 했던  뉴스는  세계를 덮친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초전이었다. 그는 직장에 가지 못했고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는 화상채팅으로 일을 했고  화상채팅으로 수업을 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듣도 보도 못한 슬로건 하에 최대한 타인과의 접촉을 삼가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가족 외에는 남자 친구조차 만나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배를  사이였다. 연인이지만 집에서 매일 만날  있는 그가 점점 가족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2월만 지나면, 3월만 지나면, 가을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 했던 코로나 사태는 결국 우리의 1년을 통째로 갉아먹어버렸다. 다사다난했지만 동시에 아무런 추억 없이 끝나버린 2020년의 마지막  나는 그에게 물었다.


 : 올해는 너한테 어떤 해였어?

(예상답변=너와 함께 살게 돼서 너무 행복했어.)


그 : It was bearable.  (참을만했어.)


나 : (What?! WTF?)

? 참을만했다고? 나랑 사는 게 참을만했다고?

 

그 : because of you. (너 덕분에)



, 이래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되는구나. 나랑 가는기 참을만 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있어서 코로나 시국이 참을만했다는 였다. 0.1초간 도끼눈을 했던 나는 바로 순한 양으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또한 그가 없었더라면  지독한 코로나를 버틸  없었을 것이다. 함께 만든 추억이라곤 손을 잡고 소독액과 마스크를 찾아 동네 약국을 볐던 것밖에 없지만 우리는 서로가 있었기에 코로나 원년을 버텨낼 수 있었고    결혼에 골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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