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랑 살아?
아침 8:30
주말이라 더 늘어지게 자도 되건만 남편은 일찌감치 일어나 샤워를 한 후 나를 기다렸다. 우리는 대충 시리얼을 먹고 근처 하이마트 오픈 시간에 맞추어 매장으로 향한다.
10:00
매장 셔터가 올라가자마자 우리는 닌텐도 코너로 직행했다. (이런 걸 오픈런이라고 하는 건가?)
지난 3월, 남편의 생일 선물로 사주기로 약속했던 닌텐도 게임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이 드디어 발매되어 사러 온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젤다가 보이지 않는다. 점원에게 물어보니 게임은 저기 있는 것이 다라고 한다. 남편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하지만 옆에 있는 토이저러스 매장에서 팔 수도 있으니 가보라고 알려준 친절한 점원 덕에 우리는 다시 희망을 안고 토이저러스로 향했다.
조카 선물을 살 때 빼고는 올 일이 없는 토이저러스. 이곳에서도 우리는 닌텐도 게임 코너로 직행했지만 이번에도 젤다는 없었다. 남편은 아까보다 더 시무룩해졌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토이저러스 점원 분께 여쭤보니 계산 데스크 안쪽 서랍을 열며 ‘티어스 오브 더 킹덤 말씀이신가요?‘라고 말했다. 남편이 다시 살아난다. 우리가(남편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게임 팩이 모습을 나타내자 남편이 환희에 찬 얼굴로 미소 지었다.
계산을 마친 후, ‘해피 버스데이‘라고 말하며 게임팩을 건네자 남편은 딱 일곱 살짜리 남자아이 같은 얼굴로 기뻐했다.
10:30
30분 만에 아침 쇼핑을 마치고 우리는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편이 11시부터 친구랑 비디오 게임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미국에 사는 친구라 그쪽은 지금 한밤중인데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갑자기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해야 돼서 오늘 게임은 못하겠다는.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느긋하게 쇼핑도 하고 브런치도 먹고 들어가는 건데.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남편은 그러거나 말거나 집에 가서 젤다 할 생각에 싱글벙글이다.
11:00
집에 도착한 나는 밥을 안치고 남편은 닌텐도 스위치를 꺼냈다. 내가 불고기를 만드는 동안 남편은 젤다 세팅을 하고, 우리는 아점을 먹었다.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도 젤다만 붙잡고 있는 남편이 얄미워서 청소기와 화장실 청소를 부탁했더니 남편은 빠르게 청소를 해치운 뒤 다시 게임으로 돌아갔다.
12:30
내가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때에도 남편은 소파에 앉아 젤다를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게임에 몰두한 남편을 보며 앞으로 네다섯 시간은 저 상태 그대로겠구나 생각하여 집을 나섰다. 친구에게 이 일을 이야기해 주니 ‘완전 아들이랑 사는 것 같네’라며 까르르 웃는다. 그러고 보니 위 글에서 ‘남편’ 자리에 아들이라고 써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16:30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편은 4시간 전과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포즈로 앉아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역시나 꼼짝 않고 신나게 게임을 한 것이다. 주변에 과자 봉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니 주전부리를 먹긴 했나 보다. 그렇게 재미있을까.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라고 구박한다. 남편은 미적미적 일어나 허리를 돌린다. 여전히 컨트롤러를 손에 든 채. 게임을 그만하게 하고 싶은데 핑곗거리가 없다. 계속 생각을 하다 묘수가 떠올랐다. 동네에 기가 막힌 수제 버거집이 있다고 꼬시는 것이다. 햄버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남편은 역시나 미끼를 덥석 물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남편에겐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하루였던 것 같다. 늘어지게 게임하다가 저녁으로 햄버거를 먹으러 가는 하루. 사실 나에게도 딱히 손해 볼 건 없는 하루였다. 남편이 좋아하니 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