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녀장의 탄생’
요즘 좀 특이한 책을 읽고 있다. 요상한 오색찬란한 표지에 딱 봐도 페미니즘 냄새가 풀풀 나는 ‘가녀장’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양성평등은 지지하지만 페미니스트라 말하기에는 조금 조심스러운 나는 이 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냥 덮어놓고 ‘여자는 위대해’라고 말하는 책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무슨 바람인지 갑자기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사는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냥 훌쩍 분 바람에 실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암튼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하드코어한 페미니즘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귀여운 반소설 에세이 같은 책인데, 유튜브 쇼츠 보듯 술술 읽힌다.
미국인인 주제에 어떻게 이 책에 대해서 아는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책을 본 (책벌레)남편이 나에게 묻는다.
“Oh! I know this one! How was it?”
“어… 쫌 특이해. 작가 본인 이야기인데 이 작가는 출판사를 차리고 엄마와 아빠를 직원으로 고용했어. 아빠는 운전하고 엄마는 밥을 차려주는 대가로 딸이 매달 엄마 아빠한테 월급을 줘. 업무 시간에는 서로 존대말을 하고“
“Wow. weird”
생각했던 스토리가 아니었는지 남편은 금방 흥미를 잃는다. 남편과는 달리 나는 계속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는 중이다. 주인공 이슬아 작가는 20대의 나이에 출판사를 차리고 출판사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엄마와 아빠에게 급여를 지불한다. 그들은 딸을 대표님이라고 부르고 급여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제대로 된 노동력을 제공한다. 스케줄을 관리하고 재고 관리, 주문 관리, 메일 관리, 청소 관리, 식단 관리 등등 진정한 가족 기업이다.
이슬아 작가는 책 속에서 부모님, 심지어 조부모님마저 이름으로 부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닌 ‘존자’와 ‘병찬‘, 엄마와 아빠가 아닌 ’복희‘와 ’웅이‘라고 부르는,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엄청난 파격에서 은밀한 쾌감이 느껴진다. 어디 부모 존함을 함부로 부르냐는 호통의 시대에서 커 온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경칭 없이 부름으로써 진정한 평등과 그들을 우리와 같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이해하려는 관용이 생겨남을 느낀다.
‘가녀장’
가부장을 비튼 말이긴 한데, 소설을 읽다 보니, 집안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소녀이면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 옛날 ‘소녀가장‘이 떠오른다. 가녀장이 소녀가장과 다른 점은 ‘소’가 빠지고 ‘가’와 ‘녀’의 자리가 바뀌었다는 건데 소녀가장은 안쓰럽고 측은함의 대상이었지만 가녀장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 못해 권위마저 느껴진다.
이슬아 작가는 소녀가장이었다면 엄마와 아빠의 노동력을 제공받기는 커녕 그들이 해야 할 일까지 모두 떠맡고 그들에게 무상으로 경제적 지원을 했어야 됐을 것이다. 그에 반해 이슬아 작가의 부모는 딸의 홈오피스인 출판사 겸 가정집을 열심히 쓸고 닦고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를 위한 차와 간식을 준비하며 작가가 외부 강연이 있는 날이면 강연장까지 안전하게 모신다. 작가는 글만 쓰고 강연만 하면 될 정도로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서포트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슬아 작가는 부모의 노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시간을 글쓰기에 집중해 돈을 벌고, 그 수입으로 부모에게 급여를 지불한다. 직원 급여는 매달 말에 지불하는데, 급여 외에도 외할머니에게 된장 만드는 법을 배우러 가는 엄마에게 된장 출장 수당을 지불하거나 엄마가 춤을 배우기 위해 등록한 학원비는 직원 복지비로 지출하는 등 직원 복지 겸 현명한 효도를 실천한다.
사실 세상의 무수한 아들 딸들이 지금 이 순간도 부모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착취하고 있다. 엄마가 만든 된장국을 먹고 엄마가 빨아준 팬티를 입고 아빠가 일해서 산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다가 아침이 되면 밖에 나가 얼마간의 일을 하는데, 그로 인해 얻은 돈은 모두 본인의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그리고 다시 엄마가 만든 밥을 퍼먹고 엄마가 깨끗이 치워놓은 방에서 따뜻하게 잠을 자며 다시 나가 일 할 에너지를 충전한다.
사실 나는 지금껏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주변에 이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런 이들을 매우 경멸해왔다. 전남자친구와 헤어진 가장 큰 이유도 이것이었다. 이런 자식을 그대로 놔두는 부모 또한 경멸한다. 그래서 이슬아 작가의 삶의 방식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만큼의 경제적 수입이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는 구조이지만 부모의 서포트를 당연시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든다. 대가를 줄 수 없으면 스스로 해결하고, 도움을 받겠다면 그에 맞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건강한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닌가 싶다.
이 새로운 관계의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운 책. 가녀장의 시대를 많은 이들이 읽어보았으면 한다.
아래는 가녀장의 시대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발췌한 것
p228 부엌에 영광은 흐르는가 중에서-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