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들 Jan 12. 2023

발레를 등록했다.


발레를 등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등록했다.

발레는 작년 10월 회사 근처에서 처음 배우기 시작했는데 두 달만에 그만뒀다. 퇴사를 했기 때문이다. 발레 학원도 마음에 들고 선생님도 좋았지만 회사를 그만 두니 회사 근처에는 얼씬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직장인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일단은 백수로 지내기로 했는데 지금은 백수라고는 하지만 간간이 일도 하는 반백수 상태다.



반백수의 삶에 운동은 아주 중요하다.

출근이라는 아주 지랄맞고도 회사원으로서 했던 최소한의 육체 활동이 사라진 반백수는 하루에 100걸음을 걷기도 힘들다. 요즘같이 날씨가 추운 겨울이면 집 앞에 온 택배를 받기 위해 현관문을 여는 것 외에 현관문 밖으로 발을 내놓는 것도 쉽지 않다. 이불 밖은 위험하니까. 그러다 보면 핸드폰 어플 속 걸음 수는 하루 50걸음 언저리에서 머물고 조금씩 몸 이 곳 저 곳이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이 나이에 몸이 망가지면 큰 일이다. 그래서 운동이 필요하다. 요가든 수영이든 배드민턴이든 뭐든 운동 하나 정도는 등록해서 하루에 한 번은(최소한 일주일에 3번은)억지로라도(주로 돈이 아까워서) 집 밖으로 몸을 끄집어내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는 스쿼시를 택했다.


그 동안 해보고 싶었던 운동이기도 하고 라켓으로 공을 치면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쿼시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공을 치는 시간보다 공을 쫓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치는데 몇 주째 나만 허공에 라켓을 휘두르고 있자니 굴욕적이기도 했다. 공 쫓는 개마냥 40분을 이리 저리 뛰어다니니 밤에 잠은 잘 왔는데 늘 온 몸이 아프고 찌뿌둥했다.

그 때 발레 생각이 났다. 끈기없는 내가 2개월 동안 발레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이유는 발레 수업을 마치고 나왔을 때의 개운함 때문이었다. 그 개운함은 마치 잘 숙련된 스포츠 마사지사로부터 1시간 동안 풀로 전신 마사지를 받고 나왔을 때와 같았다. 온 몸의 근육이 쭉쭉 늘어나 어디 하나 뭉친 곳 없이 말끔하고 가벼운 느낌, 그런 느낌을 수업이 끝날 때마다 받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발레 학원이 어디인지 검색해보았다. 지하철로 네 정거장. 결코 가깝다고 할 수 없는 거리다. 내가 잘 다닐 수 있을까? 10분 정도 고민하다 발레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등록하고 바로 수업 들을 수 있나요?


한 달 만에 다시 들은 발레 수업은
역시나 만족스러웠다.

목을 쭉 빼고 골반을 바깥쪽으로 돌린 채 배에 힘을 주고 발레 동작을 하니 머리부터 발 끝까지 기가 도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전신이 가뿐해졌다. 사람마다 다 맞는 운동이 따로 있다는데 난 역시 발레가 맞나 보다.


사실 초급 발레수업의 내용은 매일 똑같고 지겹다. 약간의 스트레칭 후 플리에, 탄듀, 제떼 같은 똑같은 동작을 매 시간 반복한다. 언뜻 쉽고 지루해 보이는 동작이지만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과 집중이 필요하다. 복근을 지퍼 잠그듯 끌어 올려 잠그고 양 골반은 바깥으로 턴아웃한 후 엉덩이가 빠지지 않도록 앞으로 끌어당겨 몸을 일직선으로 곧추세운 후 오로지 고관절만을 이용해서 발동작을 하고 나면 쇄골과 목덜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오늘 이 시간 내가 집중해서 동작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다음 시간의 나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전 시간에 제대로 동작을 했을 경우 확실히 동작이 훨씬 더 수월하다. 몸이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나는 또 다시 집중해서 복근과 엉덩이를 끌어 올린 채로 동작을 반복한다. 그럼 다리가 지난 시간보다 1mm정도 더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옆 사람보다 못한다고 기 죽을 필요도 없다. 어차피 옆 사람은 거울 속 자기 동작만 보기에도 바쁘다.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일이다.


나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지도, 선생님처럼 다리를 머리 끝까지 올리고 싶지도 않다. 아니, 올리고 싶지만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꿈도 꾸지 않는다. 그저 한 시간, 한 시간 거북이처럼 천천히 나아지는 내 몸을 느끼고 싶은 것 뿐이다. 그게 내가 발레를 하는 이유고 발레의 매력이다.싫증을 잘 내는 내가 얼마나 지속할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발레는 다른 운동보다 오래 지속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쫄보의 고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