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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들 Jan 14. 2023

내가 술 먹는 남자와 결혼하다니


우리 부부는 둘 다 술을 좋아한다.

우리 부부는 소주 빼고 맥주, 양주, 와인 등 주종을 가리지 않고 술을 즐긴다. 술을 마시면 서로가 어떻게 변하는지 잘 알고 또 그 모습을 좋아한다. 서로를 통제하지 않아도 각자가 주량을 조절하고, 밖에서 다른 사람과 마시기보다 둘이서 집에서 편하게 마시는 걸 좋아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최고의 술친구다.


나는 평소 모든 감정을 남편과 솔직하게 공유하려고 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미처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술기운이 살짝 올라오면, 마음의 빗장이 느슨해지면서 자존심 따위 대수냐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최근 서운했던 점부터 고마웠던 점까지, 굳이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싶은 사소한 감정까지 싹싹 긁어 두서없이 늘어놓으면 그는 내가 서운했다는 것에는 사과하고, 고마웠다는 이야기에는 내가 더 고맙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나는 그와 술 마시는 것이 좋다.



사실 난 내가
평생 술을 마시지 않을 줄 알았다.

우리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엄마는 태어나서 한 번도 입에 술을 대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이면, 그러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을 했다. 아빠는 술주정을 해댔고 엄마는 윽박을 질러댔다. 술에 취해 눈이 돌아간 사람과 분에 못 이겨 눈이 돌아간 사람이 치고 박고 싸우는 걸 보는 아이는 결코 정서적으로 평온할 수 없다.


엄마는 술이 웬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너네 아빠는 착한데 술이 문제야. 엄마 말이면 다 맞는 줄 아는 여느 아이들처럼, 나도 술이야말로 아주 고약하고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흔한 대학오티나 엠티에 가서도 술을 먹어본 적이 없다. 성인이 된 즐거움을 음주로 풀고 헤롱대는 동기들을 보면 아빠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나도 점점 나이를 먹고 인생의 단 맛 쓴 맛을 경험하다 보니 술의 맛 또한 깨닫게 되었다. 엄마에게 속아(?) 백해무익한 줄만 알았던 술이 얼마나 맛있는지, 얼마나 기분을 좋게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내가 술 먹는 남자와 결혼하다니


비록 나는 술을 먹게 되었지만 남편만큼은 술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이길 바랐다. 결혼만큼은 아빠 같지 않은 사람, 술을 먹지 않는 사람과 하고 싶었다. 내가 바라는 남편의 조건은 술담배 안 하는 플로리스트 연하남이었는데 남편은 담배 안 피우는 연하남이니까 절반은 성공한 것 같다. 남편은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술을 좋아했다. 연애시절 그와 술을 마시는 건 굉장히 즐거운 데이트 코스였지만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나도 엄마처럼 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내가 회사에서 멘탈이 탈탈 털린 날이었다.


"오늘은 기분이 꿀꿀하니까 술을 마셔야겠어"

라고 말하자 남편이 말했다.


"우울할 때는 술을 마시면 안 돼.
술은 기쁠 때, 축하할 때만 마시는 거야"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너무 지당 해서였다. 우울하다고, 화난다고 술을 마셔댔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술은 아무 때나 내가 먹고 싶을 때 먹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끄러웠다. 슬픔이나 분노는 술을 마신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날 후회와 함께 합체해서 돌아올 뿐. 나야말로 아빠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구나.


남편은 단 한 번도 술 먹고 울거나 신세한탄을 하거나 울분을 토한 적이 없다. 아마도 그가 말한 규칙때문인 듯 하다. 아무 생각없이 집 안 여기저기 양말을 벗어 놓는 꼬마 신랑인 줄 알았는데 나름 술에 대한 철학이 있었다. 이럴 때 보면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내 최고의 술친구, 꼬마 신랑. 건강하게 오래오래 술을 즐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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