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 스푼 1 -- 원주의 3‧1운동 ①
3‧1운동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많다.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둔 유관순…. 원주 일원에서도 3·1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유관순처럼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둔 청년도 있었다. 부론면 노림의숙 졸업생 한범우. 숨을 거둘 때 나이 만 18세였다.
1919년 한범우를 비롯한 노림의숙 졸업생들은 부론면사무소(당시 흥업면 소재)에 동원되어 원주 군수 오유영의 시국 강연을 들었다. 3·1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강연이었다. 독립이다 만세다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군수의 강연에 분노한 노림의숙 졸업생들은 강연장에서 반발했지만 면사무소 직원들에 의해 강연장에서 쫓겨났다.
한범우는 졸업생 일곱 명과 함께 노림리로 돌아와 '대한독립만세' 깃발을 들고 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인 노림의숙 부근에서 군수 오유영를 기다렸다. 군수는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 당나귀를 타고 나타났다. 노림의숙 졸업생 여덟 명은 군수도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했다. 철원 군수는 군중들과 만세를 불렀는데 독립운동을 하지 말라는 연설을 하고 돌아다니는 원주 군수의 행위를 비판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며 둘러싼 주민들은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원주 군수 오유영은 만세를 강요하는 졸업생들 앞에서 강연 내용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다가 쫓기듯 문막으로 이동해서 일본 헌병대에 신고했다.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한범우와 정현기가 체포되었고 나머지 졸업생들은 피신했다. 체포된 한범우는 10개월의 형을 받고 복역하다 석방되었지만 고문과 학대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흥호리 부론면사무소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말라며 강연하고, 노림리 노림의숙 앞에서 한범우를 비롯한 졸업생들에게 붙잡혀 곤경을 치르다 문막으로 가서 헌병대에 신고한 원주 군수 오유영은 친일인명사전에 떡하니 이름이 올라 있다.
1907년 군대해산 당시 시위대 교관으로 있다가 전역했던 오유영. 강원도 금성 군수가 된 후 1912년 일제로부터 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4년 원주 군수로 부임해서 1919년 한범우와 만났다. 당시 나이 45세. 이후 오유영은 친일반민족행위의 외길을 걸어가면서 일본 천황으로부터 각종 포상을 받아 챙겼다.
2004년 부론초등학교로 통폐합되면서 폐교된 노림초등학교 자리가 노림의숙 자리였고 이 마을이 노숲마을이다. 먼 옛날 노나라에서 옮겨 심은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었다고 노숲마을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 노숲마을은 원주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사립학교 노림의숙 교사였던 홍남표와 어수갑이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노림의숙 졸업식이 열린 3월 22일 졸업생들에게 배포되었고 3월 27일 한범우를 비롯한 졸업생들이 만세운동을 말리며 돌아다니던 원주 군수 오유영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노림리 당산목 느티나무 앞에 서면 채 피어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뜬 한범우 생각이 난다, 아울러 친일반민족행위의 외길을 걸어간 오유영이란 이름도 떠오른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표시도 남아 있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