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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원 Aug 15. 2024

원주 최대 규모, 소초면 만세운동

역사 한 스푼 2 - 원주의 3‧1 운동  ② 

소초면 일대는 천도교 신도가 많았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되면서 해월 최시형은 관의 추적을 피해 강원도 일대에서 숨어 지냈다. 최시형의 제자였던 손병희와 이화경 등이 소초면 둔둔리 일대에서 숨어 지내면서 동학이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행정구역상 소초면은 원주에 속해 있지만 지리적, 교통적으로 횡성과 연결이 수월한 편이어서 횡성 장을 보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1919년 3월 27일과 4월 1일 횡성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천도교 신도가 많았던 소초면 일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소초면 둔둔리에 살고 있던 천도교인 강만형은 횡성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4월 1일 횡성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둔둔리 강달회와 하영현이 일본 수비대와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소초면 교항리 추병륜도 체포되었다. 횡성군 갑천면 출신 최양옥은 서울 중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3월 27일과 4월 1일 횡성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횡성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피살된 강달회, 하영현의 장례식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소초면 만세 시위가 준비됐다. 둔둔리 박영하, 평장리 신현철, 김정환이 중심이 되었다. 만세 시위를 계획한 사람들은 소초면 의관리, 장양리, 평장리, 교항리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때 연락을 하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소초면 수암리였다. 수암리에 소초면 관할 헌병 출장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소초면 일대 현재 모습

 

4월 5일 사람들이 각지에서 부채고개로 모여들었다. 부채고개는 소초면사무소에서 가까운 고개였다. 평장리, 장양리, 둔둔리, 교항리 주민 400여 명이 부채고개에 집결해서 소초면사무소로 향했다. 박영하가 이끄는 시위대는 면사무소에서 면장 남상철을 끌어내 함께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면장은 끝내 거절했다.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다 오후 다섯 시 쯤 해산했다.  

   

4월 7일 수암리 헌병 출장소에서는 조선인 헌병보조원 안한여, 변덕준을 앞세워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사람 15명을 체포, 원주헌병분대로 끌고 갔다. 이중 신현철은 징역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태형을 받고 석방되었다. 4월 1일 횡성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된 강만형은 징역형에 처해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모진 고문을 받아 순국했다.     


소초 면사무소에 세운 소초면 만세운동 기념비


소초면 만세운동은 원주 일대 만세운동 중에 가장 큰 규모로 전개되었다. 천도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횡성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총에 맞아 숨을 거둔 강달회, 하영현의 장례식을 통해 소초면 만세 시위가 준비되어 400여 명이 참여했던 대규모 만세운동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후 둔둔리를 중심으로 전파된 천도교 신도들이 횡성, 소초 일대의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항일의병운동에 참여했던 박영하, 강도영, 추병학, 추병륜 역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만세 시위의 구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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