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 스푼 4 - 원주의 3‧1운동 ④
'공립원주보통학교 교원 홍의식 씨가 학교로 가는 중, 길에서 지난달 이십칠일에 의병에게 잡혀 시계와 돈 삼만 환을 빼앗기고 무한히 곤난하다가 간신히 위험과 곤경을 면하야 본월 이일에 학교로 돌아왔다고 하더라.'
1907년 12월 10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이다. 원주초등학교의 전신이었던 공립원주보통학교 교사가 의병에게 붙잡혀 돈과 시계를 빼앗기고 곤경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풀려났다는 이야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서당이나 향교로 상징되는 전근대 교육기관에서는 양반으로 상징되는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했다. 조선 후기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가 크게 흔들리면서,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양반층에 편입된 서민들의 자제들까지도 서당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지만 모든 아동들이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교육을 받을 대상이 특정 계층으로 한정되었던 전근대 교육과는 달리 근대 교육은 모든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다르다. 의무교육이란 이름으로 모든 아동들이 입학해서 공부해야하는 현재의 교육제도가 근대 교육에서 마련된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 교육은 1895년 갑오개혁으로 교육입국 조서가 발표되면서 사범학교와 소학교 설립이 확대되었다. 충군애국의 인재 양성을 목표로 일반 국민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설립된 학교가 소학교였다. 소학교는 아동 신체의 발달에 맞추어 국민교육의 기초와 생활에 필요한 보통의 지식 및 기능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원주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 학교가 원주공립소학교였다. 1896년 춘천공립소학교, 강릉공립소학교와 함께 원주공립소학교가 문을 열었다. 원주공립소학교에서 처음으로 교사로 발령난 사람은 한성사범학교 출신 이승의였다. 이승의 교사는 10년간 근무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노골적으로 이어가던 일제는 전국에 설치되었던 관·공립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편시켰다. 보통학교로 개편되면서 일본어 시간이 필수로 지정되고 국어 수업 시간은 줄어들었다. 관·공립 보통학교에는 의무적으로 일본인 교원을 1명씩 배치했다. 원주공립소학교도 공립원주보통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원주공립보통학교에 배치된 일본인 교원 이토는 교감이 되어 교사들과 학생들을 감시, 통제했다.
학교 건물을 새로 짓고 수업료와 수업 도구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취학을 독려했지만 일제의 통제를 받는 공립학교에 대해 한국인들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공립학교 입학 학생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중류 이상 가정의 자제들이나 일본어를 이해하는 지방관의 자제들조차 취학을 꺼려했다.
원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립원주보통학교에 입학하려는 학생이 거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를 향한 반감도 표출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권회복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사립학교와 개량서당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이 무렵 원주에서도 서당을 중심으로 국권회복과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교육이 확산되었다. 부론면 손곡리, 소초면 둔둔리, 흥업면 사제리, 부론면 노림리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 지역은 1919년 3.1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