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산책과 자본주의적 일상

by 파란

특별한 취미 생활을 하지 않는 내가 꽤 오랫동안 해온 게 있으니 바로 산책이다. 산책을 처음 시작한 건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지도교수님이 나에게 체력 관리의 필요성을 역설하시며 본인이 몇 십 년 동안 꾸준히 산책을 한 덕분에 오랫동안 앉아서 책을 볼 수 있었다는 말씀을 나에게 하셨던 때부터였다. 어려서부터 운동이라면 치를 떨던 내가 그나마 살아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산책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살던 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출발해 학교를 휘감은 산을 따라 걷다가 옆 학교 근처 지하철역에서 돌아오는 루트로 자주 산책을 했다. 그러다 대학원을 그만둔 뒤 집에서 꽤 오랜 시간 백수 생활을 할 땐 괜한 눈칫밥과 스트레스로 언제나 소화불량을 달고 산 덕분에 점심 먹고 1시간, 저녁 먹고 2시간을 산책을 하는 데 보냈다. 처음엔 각종 예능을 핸드폰에 넣어 보면서 산책을 했지만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한 뒤로는 언제나 팟캐스트와 함께 산책을 다녔고, 마침 내가 듣는 대부분의 팟캐스트들이 기본 1시간이 넘었기 때문에 산책하기엔 아주 적당한 길이였다.

취직한 뒤로도 산책은 꾸준히 이어갔다. 첫 회사 근처 마포의 자취방은 가까운 곳에 홍제천이 있어서 매일 저녁을 먹고 1시간~1시간 반씩 그곳을 걸었다. 그 다음 이사한 은평은 집 바로 앞에 불광천이 있어서 자주 그곳을 걸어다녔다. 산책으로 걷기도 하고 마포 쪽에서 약속이 끝나면 불광천을 따라 걸으며 집으로 가기도 했다. 당시 내 산책길은 불광천 외에도 한 곳이 더 있었는데, 바로 마트였다.

집에서 걸어서 대략 20분 정도 되는 거리에 이마트 은평점이 있었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내가 유일하게 사람이 많아도 괜찮아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여름이면 벌레가 가득하고 겨울이면 칼바람이 부는 불광천과는 달리 이마트는 언제나 쾌적한 온도와 밝은 조명으로 나를 맞아준다. 어디 그뿐인가. 어지간해서는 바뀔 게 없는 불광천의 풍경에 비해 이마트는 때 되면 매대의 상품이 바뀌고 때 되면 이벤트 매대가 설치되어 심심할 틈이 없게 해준다. 이마트 은평점은 특히나 지하1층부터 지상8층까지 매장이 있어서(물론 주차장과 문화센터를 포함하면 층수는 더 많다) 볼거리, 살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하다.

우선 들어가자마자 지하1층 식품 코너부터 한 바퀴 돈다. 시간이 맞으면 폐점 직전 큰 폭의 할인율이 적용된 상품을 사기도 하지만 웬만하면 그냥 무슨 물건이 있는지 보기만 한다. 보기만 해도 배가 든든해진다. 코시국 전만 해도 만두, 피자 등 각종 냉동식품과 냉면, 국수, 고기 시식 코너가 많았더랬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너무 옛일이 된 느낌이다. 가끔은 (아마도 베트남산이었던 걸로 기억하는) 블랙타이거새우 할인 행사나 참치 해체쇼 같은 걸 보기도 하지만 그런 건 신기한 구경거리로 남겨두고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은 가공식품과 생활용품 매장이다. 최근엔 노브랜드 전용 매대가 들어섰던데, 이마트 PB상품이 워낙 다양해서 이 역시 좋은 구경거리다. 코시국 이전만 해도 2층은 라면 시식코너의 전쟁터였다. 각종 라면 회사의 판촉원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라면을 홍보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라면 시식을 권했다. 나 역시 산책하러 나와서 라면 시식을 꽤나 자주 했다. 어쩌면 나는 라면을 시식하기 위해 이곳에 오는지도 모른다. 라면 코너를 한 바퀴 돌며 모든 시식용 라면을 먹은 뒤 JAJU 코너를 간다. 어디선가 본 듯한 디자인의 잡화들이 가득하다. 그중 몇몇 개는 혹해서 살 뻔하기도 한다. 이럴 때를 대비해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3층으로 올라간다.

3층은 화장품 및 잡화, 4층은 옷 코너다. 그냥 한 바퀴 휘~ 돈다. 5층은 화장실, 주방, 거실 코너다. 이곳은 꽤 유심히 보게 되는데, 여기서 괜찮은 프라이팬이나 책장, 샴푸 수납장을 산 적도 있다. 그 외에도 볼수록 이런 게 있으면 편하겠는데 싶은 물건이 많다. 이번에도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을 달래 위층으로 올라간다. 6층은 스포츠용품과 장난감 코너다. 홈트를 위해 여기서 고무 밴드라든가 요가 매트 같은 걸 사기도 했지만 더이상 운동기구를 살 필요는 없으니 지나갈까 하지만 장난감 코너에 있는 레고에는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간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을 졸라야 간신히 하나를 얻을까 말까 했지만 이젠 언제든 사고 싶을 때 사고 싶은 만큼 살 수 있는 장난감이 레고다. 하지만 보관할 곳이 없다. 결국 취미의 끝은 부동산인가 하는 씁쓸한 생각으로 다시 한번 위층으로 간다.

7층은 일렉트로마트, 전자제품 전문매장이다. 여기서 미니 오븐을 산 적이 있지만 청소하기가 어려워 몇 번 쓰고 부모님 댁 창고에 보관 중이다. 몇 년 전 무선 청소기와 에어프라이어를 사려고 이 매장에 있는 여러 청소기를 둘러보고 직원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인터넷으로 샀더랬다. 매장에 있는 제품들은 아무래도 가격대가 높은 것 위주로 있는 것같아 쉽게 사기 어려웠다. 그래도 매장 한 쪽을 차지한 애플 주변기기와 컴퓨터 주변기기 코너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아 보는 맛이 있다. 가끔 노트북이 끌리기도 했지만 집에 멀쩡한 데스크톱이 있고 태블릿PC가 있는데 노트북까지 사서 뭐 하나 싶은 생각에 입맛만 다시며 지나갔다. 보통은 여기서 내려가지만 기왕 왔으니 8층까지 가보자.

8층은 푸드코트와 카페, 병원 등등이 있다. 가끔 집에서 밥 먹기 귀찮을 때 여기 와서 밥을 먹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짬뽕과 탕수육을 세트로 판매하는 곳이 집 근처에 없기 때문이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맛이면 만족하는 나의 평범한 혀에 감사하며 마지막으로 1층으로 간다.

1층에는 음료, 과자 등의 가공식품과 스타벅스가 있다. 가끔 e-프리퀀시 때문에 이곳 스타벅스에 오기는 하지만 자주는 아니다. 다만 한여름 마트 산책을 할 때면 너무 덥고 목이 마를 때 여기서 커피를 사서 마시며 마트를 돌아다니긴 했다. 1층에서도 코시국 전엔 신상 과자나 치즈 시식을 하곤 했는데 이젠 그런 광경을 찾아볼 수가 없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자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대개 그냥 지나치지만 가끔 나초가 매우 당길 땐 하나씩 집어가기도 한다. 아님 치즈나 요거트를 사들고 집에 가기도 하고.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 코스로 마트 산책을 마치고 불광천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면 대략 1시간이 좀 넘게 걸린다. 평소 불광천 산책에 걸리는 시간과 비슷한 훌륭한 산책길이다. 그리고 항상 나는 왜 마트를 산책하는 게 기분이 좋을까 생각한다. 언제나 물건으로 가득한 매장은 비록 무엇도 사지 않지만 마음만은 풍족하게 해준다. 수많은 이들이 물건을 사고 사고 또 사도 결코 매대가 비지 않는 건 그만큼의 재고가 있다는 것. 수요만 있다면, 아니 수요가 없더라도 기어코 수요를 만들어서라도 결코 공급이 달리지 않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최일선 현장이 바로 이곳 아닌가.

이토록 자본주의로 가득한 공간이 이마트와 같은 대형 마트가 아닌 곳에 또 있을까? 물론 매우 많다. 코엑스라든가 번화가에 있는 백화점이라든가. 하지만 주택가에서 걸어서 20분 이내의 곳에 자본주의의 첨병이 또 있을까? 물론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편의점을 들 수 있지만, 편의점은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가는, 지극히 목적 지향적 공간이지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눈앞의 자본주의적 일상을 실감하면서 동시에 빈손으로 마트를 나오는 나 자신에게서 풍기는 반자본주의적 행동에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걸까? 몸은 자본주의에 굴복했지만 마음만은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걸까? 어느 쪽이건 거대한 이마트는 나에게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산책길을 제공해주는 곳이다. 수많은 이들의 일터이자 장보는 장소이자 골목상권의 블랙홀이지만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코로나19와 고양이의 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