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했다고. 기특하다고. 그리고 우리 더 친해지자고.
아직도 가끔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꾼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쯤이었나. 세로로 긴 눈동자와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닌 초록색 티라노사우루스가 꿈에 나왔다. 덩치가 산만한 녀석이 파충류 특유의 눈을 번뜩이며 쫓아오는데, 아주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따로 없었다. 그 날 밤은 처음으로 쫓기는 꿈을 꾼 날이었고, 처음 혼자 자겠다고 배짱을 부린 날이었다.
당시 살던 집은 여덟평 남짓한 곳이었는데, 나름 나뉘어진 조그만 공간이 있어서 그 곳에서 혼자 자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 도중에 깨서 울먹이며 엄마를 부르고, 부모님이 자고 있던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그 이후에도 다양한 것에 쫓겼다. 사람, 동물, 귀신, 게임 캐릭터. 특히 사람 중에는 정체모를 사람, 살인마, 갱단두목, 심지어 친할아버지까지(지게를 지고 나타나 무섭게 하시길래 도망 갔다). 어떤 때는 무언가에 쫓기는지도 모른채 그냥 도망치던 때도 있었다.
쫓기는 꿈은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나 목표에 압박감을 느끼고 있거나, 고민과 문제 같은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는 무덤덤한 성격이어서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그때 나를 쫓던 티라노사우루스는 어디로 갔을까. 아니면 그때 그 놈이 모습을 바꿔서 여저힌 나를 쫓고 있는 것일까.
내 안에 어떤 아픔 있는지
무시하고 지냈어 미안해
깊게 생각해봤자지 싶어
그냥 지내보려 했어 사실
기다리던 친구의 전화
그 한 통이 얼마나 좋은지
참 외로운 사람이었구나
참 외로운 사람이었구나 싶어
바쁜 일들 사이에
반가운 얼굴 재밌는 이야기
꽤 살만하다 생각했어
또 맛있는 먹거리와 날 무감각하게 만드는
이 모든 거
근데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나 봐
내 안에 여태 숨어 있던
어린 소년이 말을 걸어와
오랜만이야 어렵게 말 거네
사실
사실 그동안 많이 아팠다고
어렵게 어른이 된 지금에 와
옛이야기들을 굳이 꺼내놓는 게
부질없는 일이라며
마주하려 하지 않았던 날
후회해
나 사는 게 바쁘단 핑계로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나 봐
나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었나 봐
폴킴 -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처음 이 노래의 가사를 듣었을 땐 정말 내 얘기인줄 알았다.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하루하루 바쁜 일상 속 분명 재밌는 일, 좋은 일도 많았다. 세상은 분명 살 만한 곳이고, 나는 꿋꿋이 잘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작 내 마음 속에는 아직도 티라노사우루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이제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지, 왜 쫓기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 체.
그 녀석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우선, 혼자 자겠다고 용기를 낸 그때의 나 자신을 꼭 안아주고 싶다. 너는 정말 용감하고 멋진 아이라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나도 이 나이 먹고도 쫓기고 있다고.
그리고 오늘 밤에도 무언가에 쫓길지도 모를 지금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잡히면 어때. 한번 죽어라 맞서 싸워 보던지, 그건 무서워서 안되겠으면 크게 소리라도 질러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