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임은 어떻게 대표님이 되었을까?
4. 박부장 이야기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하고 시키는 것만 해도 너무나 버거워 정신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 응급실처럼 항상 돌발적인 일들 투성이었다. 납땜을 하다가 갑자기 자재가 들어왔다고 내려가서 날라야 하거나 생산라인 지원을 가거나 여튼 예상을 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었다.
그러다 보니 매일매일이 긴장이고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저녁 먹고 야근하고 8시 반에 마지막셔틀을 타고 퇴근하면 씻고 바로 기절이었다.
눈뜨면 다시 씻고 셔틀에 몸을 싣고 바로 잠이 들고 눈을 뜨면 회사 도착.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고 연구실로 올라가서 메일을 확인하고 시간이 되면 체조음악에 맞춰 체조를 하고 업무를 시작한다.
연구실이 공장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스피커를 공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공장장님이 대빵이기 때문에 연구소라지만 공장의 문화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연구실은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고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자는 아주 아름다운 이유였으나, 실상은 누가 출근했나 안 했나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체조를 벽 보고 하지는 않지 않나. 서로 바라보고 체조를 하다 보면 누가 안 왔는지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체조가 끝나면 간단하게 스탠딩 미팅을 진행한다. 스탠딩 미팅은 하루의 목표 및 할 일을 명확히 하여 일을 시작하자, 쓸데없는 회의를 줄여서 근무시간을 늘리자는 취지였으나 다 알지 않나 결국 출석체크다.
스탠딩 미팅 후 모두 커피와 담배를 피우러 간다. 짬이 안되면 가기 싫어도 따라가야 한다. 가서 간단하게 오늘 할 일을 배당받고 으쌰으쌰 한다.
지나고 나서 보면 굳이 대학원을 졸업해야 하는 학력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시키는 일만 하고 그나마도 하는 일의 대부분이 납땜과 대차로 모터나 자재를 옮기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테스트 및 테스트를 위한 준비. 온도 타점을 붙이고 챔버를 예약하고 자재팀에 가서 필요한 부품을 수배하는 일 등이 대부분의 일이었다. 이 정도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김선임은 SW 엔지니어였지만, 인원이 없어서 HW, SW, 설계, 시험 등 전반적인 모든 일을 해야만 한다.
SW의 일은 그냥 이전 코드를 재사용해서 사용하면 되지 뭐 할 일이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여튼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그러면서 아무리 허드레 일이라고 하더라도 손에 익고, 손에 익다 보니 약간은 여유시간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구소가 그리 크지 않다 보니 연구소장님이 팀장을 겸직하고 계셨고, 대부분의 부장, 차장들이 파트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김선임의 파트장은 박부장이었다.
박부장은 저녁마다 전화중국어를 했다.
중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나의 귀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느낌으로는 중국어를 아주 능숙하게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꽤나 잘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박부장은 5년 동안 중국법인에 해외 근무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녀들이 중국에 있는 국제학교를 다녔고, 국내에 들어와서도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듣기로는 중국에 가기 전에 천안에 사두었던 집값이 돌아오니 엄청나게 올라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회사생활이 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사실 파트장이 개발을 하는 자리는 아니고 관리직이긴 하지만, 인원이 워낙 없는 연구소 조직에서 밑에 사람들은 사람이 없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데 파트장 및 PL, 서브 PL 은 또 뭐야.
도대체 소는 누가 키우냐고!
박부장의 일과는 애들 일하나 안 하나 감시 및 전화, 그리고 소장님과의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티타임, 점심식사 그리고 퇴근 후에 소장님을 모시고 술과 식사였다.
따지고 보면 하는 일이 많지는 않아서 하루가 따분할 수도 있고, 매일 저녁식사로 인한 연장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래 세상에 쉬운 건 없다. 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는 것이다.
한 번은 파트 회식이 있던 날이다.
김선임은 정말 궁금하기도 했고, 부자가 되는 방법이 궁금했다.
회식자리에서 김선임은 박부장에게 물었다.
“부장님, 부장님은 재테크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돈을 벌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물어보면 박부장은 자신이 약간은 속물이 된 것처럼 느껴져서 입을 닫을지도 몰라서 약간은 돌려서 물어봤다.
“아, 김선임도 재테크를 하고 싶구나, 그렇지 한참 궁금할 때지”
“우리 집은 대대로 체구가 좀 작은 집안이야, 우리 형이 경주마 기수야, 그래서 돈이 생기면 말을 사서 대여를 하고 있지. 말은 형이 돌봐주고 말이야”
사실 말을 사서 재테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때에 처음 알았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에 나도 해보고 싶었지만, 내 말을 돌봐줄 장소도 기수도 없었기에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부러웠다.
“에이~ 부장님 그런 투자는 아무나 할 수 없잖아요? 저희가 할 수 있는 투자가 있을까요? 어린 후배들을 위해서 약간의 지혜를 나눠주세요.”
“허허허, 그래 일단 한잔 먹자고”
그렇게 한잔 두 잔 술잔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부장님 부장님 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듣기 위주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얘기를 안 해줄 것처럼 하던 박 부장도 조금씩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대학교 때 타고 다니던 차가 스쿠프야, 아버지가 물려주셨던 차를 타고 다니면서 교통비를 줄이고 시간을 줄여서 과외를 하면서 돈을 모았지.”
‘아니 그건 원래 집에 돈이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일이고, 우리 같은 흙수저는 받을 차가 없는데 무슨…..’
“그리고 대학 졸업 후에 취직을 하고 나서도 가능하면 월급의 대부분을 저축을 했어”
“그러다가 천안에 연구소가 생긴다고 그쪽으로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지, 고민을 했지만 새로운 조직에서 같이 성장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내려오게 되었지”
“그런데 내려와 보니 천안 집값이 아주 저렴했단 말이지. 그래서 대학 때부터 모아두었던 돈과 저축했던 돈을 가지고 아파트를 장만했어”
“그런 와중에 좋은 기회가 생겨 중국 주재원으로 5년간 나갔다가 왔지. 그때 집을 팔고 갈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팔지 않고 세를 놓고 갔지. 그런데 갔다 오니 5년 동안 천안이 천지개벽을 했단 말이지 삼성전자 공장이 탕정에 들어오고, 지하철이 천안까지 오게 되었지”
“그 집을 종잣돈 삼아서 천안에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들을 분양받았고, 현재는 펜타포트를 분양받아서 거주하고 있어”
“이 정도면 얘기가 됐나? 허허허 뭔가 자랑만 한 거 같네. 여하튼 중요한 건 운이 좋았고, 그 운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종잣돈이 아니었나 생각이 드네. 그러니 젊다고 돈 흥청망청 쓰지 말고 알뜰하게 모아서 얼른 종잣돈을 마련해”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종잣돈이라고 하면 얼마 정도가 적당한 금액일까요?”
“음…. 어려운 질문인데, 이 종잣돈이라는 게 정해진 건 없어요. 전에는 한 3천만 원만 있어도 뭐라도 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물가가 하도 올라서 그래도 1억은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뭐 정답은 없어요.”
맞다. 이 종잣돈이라는 게 딱 정해진 금액이 없다 보니 너무 어렵다. 그러면 일단은 모으고 모으고 기회를 봐야 하나. 어렵네.
그렇게 회식이 끝나고 모두 헤어지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혹은 기숙사로 헤어졌다. 그러나 김선임은 약속이 있다고 말하고 혼자 남았다.
기숙사에 들어가 봐야 그냥 씻고 잠을 잘 것인데, 김선임은 박부장의 얘기로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서 기숙사까지 걸어가려고 함께 택시를 타지 않았다.
신부동에서 기숙사까지는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냥 그렇게 집으로 가기에는 머리가 너무나 복잡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일단은 종잣돈이 필요하다는 건데, 김선임의 월급의 대부분은 본가의 재건축 대출비용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종잣돈이라는 걸 모으기가 쉽지 않고, 모은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정말 가슴이 답답했다.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 2캔을 사서 기숙사에서 씻지도 않고 마셨다. 마시면서 생각을 하고 또 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맥주 2캔을 다 마시고 더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편의점에 갔다 오려면 왕복 1시간. 그렇다 기숙사는 그렇게 외진 곳에 있었다.
김선임은 그렇게 속으로 울면서 잠이 든 것 같았다. 이번생은 망했다라고 중얼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