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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 Jul 21. 2024

가끔 깊어지고 싶다

 모처럼 조용한 휴일의 몇 시간을 보냈다.

 아이는 태권도 체험학습에 갔고 남편은 늦잠을 자느라 정말 간만에 고요함이 지속됐다.

 주말에 보던 소설을 마저 읽으며 쇼파에서 뒹굴거리는데 읽을 만큼 읽고 나니 딱히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보고 싶은 티비 프로그램도 없고, 게임에도 관심없고, 요리도 하기 싫고, 나가서 걷거나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다.

 나를 둘러싼 의무나 욕구가 없을 때 나는 무엇을 하는 존재일까.


 예전에 읽었던 스캇 펙의 오래된 명저 '아직 가지 않은 길'을 다시 읽고 있는데, 이 책의 요지를 아주 짧게 말하자면 인생의 의미는 오직 사랑에 있고, 사랑이란 오로지 대상의 영적 성장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삶에 여유가 있고 만족스러운 순간들엔 문득 '그런데 이게 다인가? 나 홀로 지금 편안하고 행복하면 만족스러운 게 인생인가?' 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작년 휴직 중에 종종 그런 생각을 했고, 그래서 굉장히 오랜만에 다시 펼친 이 책의 내용이 좀더 개인적으로 다가왔다. 때때로 느끼는 내 인생의 미미함, 얄팍함, 비겁함, 안전을 추구하는 소심함 같은 것들이 자극된달까.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내가 지속적이고 유의미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누군가의 영적 성장을 도울 수 있다면 그 대상은 나 자신과 내 자식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살림을 꾸려 나가고, 취미생활을 하고, 인간관계를 맺어 나가는 모든 순간들에서 간접적으로 나와 타인의 성장이 이뤄질 수 있겠지만 그건 직관적이지는 않으니까. 


 회사에 다시 다니려니 굉장히 피로한 한편으로, 일로서 대하지 않았다면 달성할 생각도 못할 태스크를 착착 진행시켜 끝낼 수 있다는 점에서 희미한 성취감을 느낄 때도 있다. 직접적으로 뭔가를 배우거나 성장한다는 실감이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저런 과업을 실행해냈다는 기계적인 성취감에 가까운 느낌이지만.

 난 사실 공부에서든 일에서든 정해진 시간과 주어진 역량 안에서 버둥거리며 뭔가를 매듭짓고 났을 때 끝났다는 개운함 이상의 무언가, 좀더 실질적인 성취감을 느껴본 적이 잘 없다. 시험이나 일을 좋은 결과로 마무리지으면 물론 기쁘지만- 그건 너무나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감정일 뿐이지 않은가. 그것이 썩 오래가지도 않고, 한 가지 과업을 잘 마무리한 기쁨을 지나치게 오래 간직하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공부가 재밌거나 책이 재밌거나 빵 만들기가 재밌거나 아니면 아주 간혹 내가 작성하고 있는 보고서가 꽤나 마음에 들 때 등등 그런 식으로 뭔가를 즐길 때의 기쁨은 좀더 잔잔하면서도 그 일을 하는 동안 지속되므로 '달성하는 기쁨'에 비해 더 안정적이고 바람직하게 느껴진다. 이쪽이 바로 '몰입의 즐거움'에 속하는 영역이겠지. 그런데, 몰입할 수 있는 컨텐츠도 지속적인 개발의 영역이다. 그리고 점점 그런 개발과 몰입의 에너지가 떨어져간다는 게 때때로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밑도끝도 없이 땅을 파면서 한두 시간은 충분히 즐겁게 보내는 아이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그런 몰입의 대상을 이 나이가 되도록 충분히 확장시키지 못했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다.

 나의 일에서든 가정에서든 육아에서든 건강에서든 별다른 문제는 없고, 완벽히 좋진 않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좋다'라는 자족이 성립한다. 나는 그런 에피쿠로스적인 만족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일상에서 점점 별달리 성취할 대상도 성취할 욕구도 없는 스스로를 인식하면서 종종 헛헛하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뭘까. 

  얼마전에 도서관에서 내가 좋아하는 발란더 시리즈의 작가 헤닝 만켈의 자전적 에세이를 발견해 읽어보았는데, 그런 식으로 내가 우연히 읽었던 다른 작가들의 전기처럼 그 안에는 깊고 넓은 인간이 들어있었다(이상적인 인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과 슈테판 츠바이크의 전기를 읽을 때도 느꼈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자기만의 관점과 그것을 관통시키기 위한 노력-때로는 좌절들. 


 좀더 깊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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