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 입문 제1강. 기본과제
건축설계 실무를 하면서 수많은 입사지원자의 포트폴리오를 검토했습니다.
당연히 포트폴리오는 주로 건축설계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많은 포트폴리오를 보다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표지와 그다음 몇 페이지, 즉 목차와 자기소개 정도를 펼쳐보다 보면 그 뒤의 본 설계작품 내용의 수준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외는 극히 드뭅니다.
표지 한 장의 편집에서도 지원자의 대부분 성향과 능력이 드러납니다.
화면의 구성, 실린 사진 또는 그래픽, 타이틀 문구 거기에 사용된 폰트와 심지어 글자의 크기나 색상에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건축설계를 하는 능력과 포트폴리오 표지를 디자인하는 능력이 동조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능력을 개발하는 프로세스도 동조하지 않을까?
건축 디자인을 처음으로 배운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쉽게도 건축과에 들어온 대학생들은 이제 막 글쓰기를 배우거나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우는 초등학생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대학에 오기 전에 건축의 기초를 조금이라도 배우고 오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 부분이 다른 전공들과 확연하게 다른 부분입니다.
심지어 생물학과에 온 학생도 중고교 시절 생물학의 기초는 배우고,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하는 학생도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다루거나 코딩도 할 줄 압니다. 문예창작과 나 음대, 미대의 신입생은 거의 프로 수준으로 훈련을 마친 상태에서 대학에 옵니다.
그들에게는 곧바로 수준 높은 대학교육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약 글쓰기를 처음 배우는 초등학생을 가르친다면, 많이 읽고 많이 쓰는 훈련을 시킬 것입니다. 처음에는 쉬운 글을 읽고 짧은 글이나 일기를 쓰게 할 것 같습니다. 피아노를 가르친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요. 좋은 곡들을 듣게 하고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법부터 가르치겠지요.
무엇이든 처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흥미를 갖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게 해서 입학 초기부터 '내가 전공을 잘못 선택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건축디자인을 가르쳐주는 유치원은 없습니다. 심지어 초등학교부터 인문계 고등학교까지 무려 12년 동안 단 한 시간도 건축 얘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미적분 문제를 하나 더 풀어야 삶이 나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건축대학은 그런 신입생들을 받아서 기껏해야 한 학기 정도 '조형연습' 같은 것을 해보게 하고 바로 건축설계로 넘어갑니다. 조형연습은 피아노로 치면 체르니 30번쯤 됩니다. 잘 될 리가 없습니다. 대충 흉내만 내고 넘어갑니다.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간이 넉넉지 않은 것이죠.
꽤 많은 미적분 비슷한 수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진행하는 수업은 주로 3학년 수업이어서 본격적인 건축 프로젝트 하나를 설계해 보게끔 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2차원 디자인 능력을 키우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줄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매주 한 장씩 편집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이 과제의 효과를 발견한 것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입니다.
실내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몇 년 가르칠 기회가 있었는데, 한 학기는 같은 학생들에게 추가로 한 시간짜리 아무거나 가르쳐도 되는(사실은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했던)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2주 정도 본인의 명함을 디자인하게 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학생들이어서 몇 가지 디자인 원리를 설명해 주면서 진행했습니다.
그 학기의 학생들 설계능력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다른 학생들과 진행했던 그다음 학기에는 본인의 포트폴리오 표지를 디자인하게 하고, 아직 작품이 없으니 앞에 말한 것과 같이 주변 건물의 사진을 찍어서 편집하게 했습니다. 건물을 읽는 연습을 병행해서 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많은 것이 얻어지는 효과를 봤습니다.
건축 공간의 설계는 평면적인 디자인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공감합니다.
하지만 말을 바꿔서 공간 디자인 능력과 평면디자인 능력은 전혀 무관하다고 말하면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설계라고는 해보지 않은 책상물림들의 관념적인 생각입니다. 디자인을 해보면 알게 됩니다.
같은 종이에 인쇄해서 보여주는 김환기의 그림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유화가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좋은 건축 디자인을 구별해 내는 일은 본 적이 없습니다.
*덧붙임
A4 용지 한 장의 편집이 디자인의 기초를 시작하는 것이라면 본격적인 건축 쓰기의 첫 단계는 '따라 쓰기'입니다.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바이엘과 체르니가 작곡한 곡을 수없이 따라 쳐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교육방법에 반대하는 피아노 선생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건축학교에서는 이 '따라 하기'를 절대로 못하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잘못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메시나 손흥민의 흉내를 못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