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일주일 동안의 철야작업이 끝났다.
C준위는 1차로 완성된 경호작전계획을 챙겨서 서울로 올라갔다.
청와대 경호실로 가는 것이다.
"수고했다. 시내에 나가서 목욕이라도 하고 와라."
그가 주는 목욕비를 받아서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문구점에 들러 편지지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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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네가 보고 싶구나, 현수.
모처에서 모종의 비밀스러운 작업을 하기 시작해서 어제까지 닷새를 꼬박 새우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보니 초봄의 야릇한 술렁임으로 거리가 가득하고, 문득 서울에서는 졸업식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작업을 지휘하던 사람이 오늘 밤 서울에서 다시 내려오면 일단 이 일은 마무리될 것 같은데, 그때 운이 좋아 서울로 가게 되면 좋겠다.
오전 내내 회의실 테이블에 엎드려 자다가 외출을 했다.
연일 의자에만 앉아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왼쪽 발목에 통증이 와서 절룩거리면서도 걸어서 창동까지 왔다.
문화서적에 들러 책을 구경했다.
서점에 올 때마다 나는 현기증을 느낀다.
내가 읽은 책은 너무 적고, 갖고 싶은 책은 너무 많고, 가진 돈은 너무 없고.
이상(李箱)의 시집 한 권을 얇은 문고판으로 사들고 나왔다.
닷새 동안의 감금상태가 많은 피로를 갖고 올 거라 생각했는데, 별로 피곤하지가 않아서 이리저리 걸었다.
직선거리로 가장 길게 걷는다 해도 5분이면 끝에서 끝까지 가버리고 마는 마산의 중심가 창동을 세 바퀴쯤 돌다가 목욕탕에 들어왔다.
대충 사워를 하고 목욕탕 응접실 소파에 누워 네 생각을 하고 있다.
물기가 남은 가슴 위에 아리랑 담배 한 갑. 李箱詩全集 한 권.
지은이는 김해경이라고 쓰여 있다. 묘한 부조리가 느껴져서 잠깐 웃는다.
응접실의 비디오는 글린트 이스트우드와 한 수녀가 등장하는 영화를 틀어주고 있다.
한 타래의 나른함이 명주실처럼 벗은 몸을 휘감아 오는데, 잠은 오지 않는다.
참 팔자 좋은 오후다.
지난 휴가 때 네가 보여준 고마운 정성에 고맙단 말 한마디도 못하고 와서 미안하다. 이번 일로 서울로 올라가 며칠 쉴 수 있어서 너에게 소주 한 잔이라도 갚아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수녀는 군인들에게 쫓기고 있다. 그리고 방금 한 멕시코인이 프랑스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대사는 "내가 왜 죽어야 하죠?")
옷을 입고 목욕탕을 나와 다방에 앉아있다.
그 영화의 수녀. 청순하면서도 의지 있는 표정이 오래 남아 있다.
대체로 나는 모든 여주인공들을 사랑하고 싶어진다.
내 앞에 앉아있는 키 작은 레지 아가씨. 내가 쓰고 있는 편지를 궁금해하고 있다.
그녀의 갈색으로 탈색한 머리카락이 몹시 부드러워 보인다.
문득 폴 발레리의 시가 떠오르네.
'저 머리카락에 손을 담그고 잠들고 싶다'
그 생각을 하니 정말 잠이 오려고 한다.
이제 정말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일어나야겠다.
시집을 줄까 했는데 벌써 다른 테이블로 가버렸다.
친구여 항상 고맙다. 내 기억에 늘 밝은 모습이어서
1987. 2. 23
창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