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식 편지

1986

by 언덕 위의 건축가

'집에 돌아오니, 스물다섯이 되어 있었다'로 시작되는 소설을 쓰고 있망상으로 오늘도 하루를 메워가고 있어.


부질없는 노동에 몸보다 뇌가 더 피곤하지만, 대체 세상에 부질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건가 생각으로 위안하기도 하고.


누나, 보내 준 책 고마워.

해변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틀 밤을 새워야 했는데, 통영 그 볼품없는 남해의 변두리도 밤에는 꽤 볼 만하더라.

혼자서 지키는 참호라서 또 외로워질까 봐, 미리 선수 쳐서 '외로움은 뭘까'를 생각했어.

'외로움이란 쓰잘데 없는 것이다'로 결론을 내리려고.


사람들이 생각나고 누나도 생각나고 만나고 헤어졌던 걔집아이들도 생각나고.... 오히려 밤이 더 길어져 버렸네.


누나 읽어주려고 노트에서 시를 하나 골랐는데, 하필 제목이 '오늘 새벽'이다.

무슨 잠 못 이루는 여고생 같아서 관두기로 하자.

다음에 적당한 시가 써지면 그때 읽어줄게.


이외수 말투를 빌리자면, 눈물겨워할 대상이 없다는 게 눈물겨워.

하루하루 돼지바보가 돼가는 기분이 든다.

하루 종일 내가 사용하는 제대로 된 단어가 몇 개나 될까.


기도할 때마다 요구사항이 늘어나서 신에게 죄송하지만, 내일은 비나 좀 그쳐달라고 기도하자.

습기에 지쳤어. 마른 양말도 신고 싶고.


자주 웃음도 터지는 생활인데, 누나한테 쓰는 편지에만 이렇게 엄살이 넘치네.

여기도 좋아.

서울처럼 썩는 냄새도 없고. 다 살아있어.


통영의 고사리장마 속에서. 아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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