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만 10만 명의 글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 주제가 무엇이든 그 수준이 어떻든 간에 글을 쓴다는 행위는 누구에게나 권장하고 싶은 일이라서, 이런 편리한 수단이 있다는 것이 늘 고맙다.
예전에는 글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술적으로 어려웠다는 얘기는 아니고, 허무한 넋두리로 끝날 것이 뻔해서 그 허무함이 다시 글 쓰는 일을 계속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일기나 편지 정도야 누구나 쓰는 것이었지만, 일기의 정도를 벗어나는 글은 자기만 읽다가 언젠가 잃어버리고 마는 노트에 끄적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나도 잃어버린 노트가 꽤 된다.
물론 등단이나 출간을 꿈꾸며 습작을 하는 사람은 예외이고, 페르난두 페소아가 쓴 '불안의 서' 원고처럼 사후에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사실 페소아 입장에서는 내 잃어버린 노트와 다를 게 없지만)
하지만 그 시절 우리들이 쓰고 있던 글들은 페소아의 그것처럼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글을 쓰기가 힘들었었다. 나처럼 등단을 꿈꾸지도 않았던 사람이, 일기나 편지의 범위를 벗어나는 진지한 글을 꾸준히 쓴다는 것에 어떤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도 읽을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와 관련해서 얼마 전에 재미있는 일을 겪었다.
작년, 지금 거주지로 이사오기 전 먼저 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글을 쓰는 직업의 젊은 여성이었다.
이사 날짜 등에 대한 의논을 메신저로 하다가, 몇 가지 공통 관심사가 있어서 다른 이야기까지 잠깐 나누게 됐었다.
나의 직업을 알게 된 그녀가, 하루는 조경에 관한 독특한 글을 읽었다며 나에게 보내줬다.
'귀조경'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일평생 나무만 길러온 노인이 말씀하시길, 조경 중에 제일은 귀조경이라 하신다. 키 큰 나무, 키 작은 나무, 잘생긴 나무, 못생긴 나무를 두루 심어놓고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이따금 이파리와 꽃잎의 맛을 보는 조경도 일품이지만, 무엇보다 제일의 조경은 이 나무들이 철 따라 새들을 불러 모으고, 새들은 제 각기 좋아하는 나무를 찾아들어 저마다의 소리로 목청 높게 노래 부르는 것을 듣는 일이라, 키 큰 나무를 심어 놓으면 키 큰 나무에만 둥지를 트는 새의 노래를 들을 것이요, 키 작은 나무만 심어 놓으면 키 작은 나무에만 날아오는 새의 노래를 들을 것이니, 그것은 참된 귀조경이 아니라 하신다.
오랜만에 봉창을 열고 목노인木老人처럼 생각하거니, 나는 이 세상에 나서 어떤 나무를 심어왔고, 내 정원에는 어떤 목소리의 새가 날아왔던가, 나는 또 누구에게 날아가 키 큰 나무, 키 작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오늘처럼 봄날의 노래를 들려줄 것인가.
처음 듣는 얘기였다.*
궁금해서 누가 이런 글을 썼나 검색해 봤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이름을 만났다.
이홍섭.
나는 그와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다. 그의 음성을 들어본 적도 없고, 심지어 우리가 알게 되었던 첫 편지 이외에서는 서로의 신상이나 안부를 묻거나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한 때 우리는 친구였다.
그 첫 편지는 내가 스물셋이고 그가 스물 둘일 때 내가 쓴 편지였다.
당시에 나는 남해의 어느 해안가에 있었고 그는 강원도 어느 산골에 있었다.
당황스럽겠지만, 얼마 전에 집에 들렀다가 너의 글을 읽었다.
나는 그 얼마 전에 너희 부대에서 전역한 OO병장의 동생이다.
너희 부대에서 형에게 준 추억록이 순전히 너의 글로만 채워져 있어서 호기심이 생겼었다.
형님이 그러시길, '너랑 비슷한 애가 하나 있다.'
너는 시인이 될 애라 말하셨고 나는 건축가가 될 것 같으니, 내 생각에 우리가 평생 마주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혹시 노트 속에만 갇혀 있기 싫어하는 글이 있다면 서로 나눠 읽는 것은 어떨까.
대략 이렇게 기억되는 편지였다.
그에게서 동의를 받을 것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그가 글 속에서 밝힌 자기의 노트 이름이 '亡命手帖'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쓰던 노트의 이름은 '流配日誌'였다.
지금은 오글거려서 한글로 그 이름을 적기도 민망하지만, 원하지 않던 공간에서 소통되지 않는 무리의 물 위에 떠있는 듯한 고립감을 이십 초반의 문학청년들이 최선을 다해 안전하게 작명한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단 한번 안부를 묻는 일도 없이 묵묵히 글을 적어서 나눠 읽었다. 서로의 글에 대한 언급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워낙에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손으로 쓰던 시절이라서, 노트에 들어있던 글을 편지지에 옮겨서 보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편지지에 직접 써서 보냈다. 그런 글들은 영원히 내 손을 떠나 나중에는 내가 무슨 글을 보냈었는지 기억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미안하게도 그가 나에게 보낸 글들도 지금은 없다.
훗날 시인이 된 그의 어린 시절 습작들이 나에게서 증발하지는 않았었기를 바란다.
내가 쓰던 글들 중에서 아주 일부만 그에게 배달되었다. 1987년 당시에 내가 쓰던 글은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군사우편을 통해 나누기에는 위험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한 명의 독자를 갖게 된 글쓰기는 무기력에서 약간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글을 나누던 그 행위 자체가 망명과 유배의 낙오감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약간의 힘이 되어 주었었다.
에릭 시걸이 쓴 '닥터스'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말이 평생 나를 따라다닌다.
"남자가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책을 쓰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세칭 처자식 먹여 살리는 핑계로 글쓰기를 잊고 살다가 뒤늦게 굳은 손가락을 펴고 있는 지금.
이름도 모르는 몇 명의 누군가가 내 글을 읽는다는 사실이 이 일을 쉬지 않게 해주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 이홍섭이 강원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문득 하조대의 비치하우스호텔 주인이었던 분이 그가 말하는 목노인이 아닐까 생각이 스쳤다. 어느 초가을 내가 그분을 만나서 나무와 꽃에 대한 이야기를 장시간 들었던 것이 30년 전 일이니 , 살아계신다면 구십은 되었을게다. 평생 나무와 꽃을 사랑하고 돌보던 분이셨다.
蛇足
"정말 재미있는 인연이네요. 그 시인께 연락 한 번 해보시죠."
세입자 여성이 신기해하며 권했지만 그럴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