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와 노각볶음
할머니의 정이 담긴 연하고 부드러운 맛
마당 구석에 있는 향나무에 붙은 참매미가 새벽부터 죽는다고 우는 바람에 부스스한 눈을 치켜뜨고 어쩔 수 없이 잠에서 깼다. 어제 앞도랑 전용 풀장서 물장구를 얼마나 힘껏 치고 놀았는지 팔도 다리도 녹슨 깡통 로봇처럼 뿌그덕 뿌그덕 거리며 간신히 움직였고 터져 나오는 하품을 하다 말고 "으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아야"
나는 하품하다가 쩍 하는 소리와 함께 통증을 가져다준 입가를 손으로 감쌌는데 금세 뜨거운 뭔가가 턱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려 손가락으로 쓱 닦았더니 시뻘건 피가 묻어 나와 얼른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이런 입 찢어졌네."
급한 대로 방바닥에 있던 수건을 집어 피를 닦으며 할머니가 인기척을 내고 계신 소죽 간으로 갔다.
"할머이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냐 잘 잤다. 잠 꾸래기가 오늘은 우째 이래 일찍 인났을꼬?"
"할머이 이거 볼래? 나 입 찢어졌어"
"어디 보재이. 이런 주디가 마이 찢어졌네"
"할머이 나 입 찢어져서 죽는 건 아니겠지?"
"이잉 죽긴. 깨끄시 세수 잘하고 이빨 잘 딲고 미칠 있음 싹 나을 기여. 자 이리 와본나 내 약 발라 줄팅께"
할머니는 나를 방으로 데려가 평소에 아주아주 아껴 드시는, 옆집 할아버지가 준 토종꿀통을 열어 우산 손잡이처럼 유난히 굽은 새끼손가락에다 살짝 찍어 내 입가에 쓱쓱 발라주셨다.
"우째 밥을 푹푹 못 퍼묵고 깨작거리고 있나? 후딱 무래이. 어여 상 치고 참깨 비러 가게"
"할머이 나 입이 아파서 밥을 못 먹겠어"
"이 엄살 꾸래기"
할머니는 손으로 무릎을 짚고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나시더니 내 밥그릇을 번쩍 들곤 부엌으로 가셨고 잠시 뒤 할머니를 따라 솔솔 향기와 도착한 것은 가을날 찐 밤을 퍼 먹을 때 쓰는 작은 숟가락이 얹힌, 들기름과 찧은 참깨를 함께 넣어 썩썩 비빈 밥이었다. 나는 으쓱해진 기분으로 작은 숟가락을 들고 온갖 엄살을 떨며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잘 늙으라는 인사가 맞는 건가? 하루종일 참깨를 베신 할머니가 저녁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오셨고 다래끼에서 뭔가를 꺼내려 하셨다.
"할머이 거기 뭐 들었어?"
"뭐 들긴 노각 들었지"
"노각이 뭔데?"
"이잉 니 안즉도 노각을 몰리나?"
할머니가 우습다는 듯이 나를 보며 꺼내 드신 것은 누런 오이였다.
"에이 늙은 오이 자네"
"야가 노각이여"
"근데 이건 우뜨케 해 먹는데?"
"우뜨케 해 먹긴 반찬 해묵지"
"파란 오이도 아니고 이렇게 늙고 딴딴한데 맛이 있어?"
"맛이 있고 말고"
한석봉 엄마도 아닌데 가지런한 안사람(?)의 칼질 솜씨그간 더위에 살림을 느~무 안 한 티가 주방에서 팍팍 나길래 오늘은 큰 맘을 먹고 없는 솜씨를 쥐어짜보기로 했다. 시어머님께서 챙겨 주신, 남편이 애정하는 가지도 찌고 감자채도 볶고 꽈리고추도 살짝 데쳐 무치고 그리고 아들 녀석이 좋아하는 노각도 볶기로 했다.
"내가 칼질해 줄까?"
"오예~ 땡큐바리"
칼질은 위태위태 눈도 침침한 나를 위해 안사람은 기꺼이 칼질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나 신혼 초에 당신이 노각 볶아줬을 때 감낭국에 이은 충격이었는데 이게 또 은근 매력이 있어. 근데 이 음식 아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을 거 같아. 나 클 때도 노각은 자주 안 먹었거든. 엄마가 어쩌다 씹는 식감이 있게 빨갛게 무쳐 주셨던 기억이 있는데 노각이 특유의 시금털털한 맛이 있잖아. 그래서 맛있다곤 못 느꼈던 거 같아"
"나한테는 이 노각 볶음이 추억과 위로의 맛이야"
"왜? 클 때 장모님이 자주 해주셔서?"
"그렇기도 했고 내가 이 맛을 처음 영접했던 날 감동이 있지. 저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초저녁마다 자려고 잔 게 아니라 지쳐 쓰러져 자다 보니 구강상태가 시원찮아 입병이 자주 났어. 한날은 엄청 용감하게 하품을 했는데 진짜 툭 소리를 내며 입이 찢어져서 피가 줄줄 흐른 거야. 그때 할머이가 엄청 아끼던 토종꿀을 입가에 발라주고 들기름에 깨소금을 넣어 밥도 비벼주시고 하얗게 노각을 볶아주셨어. 노각이 볶으면 뽀얀 국물이 나오잖아. 그날 그 국물에 새로 한 뜨신 밥도 아니고 낮에 남았던 찬밥을 비벼서 먹었는데 그때 감격은 지금도 생생해"
"엄마 따라 아들네미가 노각 볶음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네. 결국은 할머니부터 시작된 입맛이잖아"
"그래도 할머이가 그래라도 챙겨줘서 내가 이 정도라도 큰 거야. 편식만 안 했어도 더 컸을 텐데.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집 입맛은 충청도와 강원도와 경상도의 어느 즈음이고 엄마의 손맛 영향이 큰 거 같애"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장모님 손맛을 많이 배워두라니"
"아니야 이미 마이 묵읐다 아이가. 난 그만 먹어도 될 것 같애"
"내가 먹고 싶어서 그래 내가"
우리 집 노각 볶음 요리법은 엄청 간단하다.
팔뚝만 한 노각을 껍질을 벗겨 반으로 가른 뒤 할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숟가락을 들고 씨를 벅벅 긁어내면 두 개의 돛단배가 생기는데 그날의 기분에 따라 사진처럼 좁게 썰기도 하고 길게 어슷 썰기도 한 다음 식용유를 두르고 노각을 볶다가 소금을 친 다음 파나 마늘을 넣고 익혀주면 노각 볶음이 완성이다.
시골마을에 거름터미나 밭가에 흔하게 마구잡이로 자라나 자유분방한 모양의 파란 오이를 매달고 있는 오이싹은 내겐 참 유익한 친구였는데 배가 고플 땐 쓱쓱 윗도리에 문질러 까슬까슬한 가시를 털고 와그작 깨물어 먹고 목이 마를 땐 툭하고 분질러 친구와 나눠먹고 시원하게 먹으려고 앞도랑 풀장에다 둥둥 띄워 놓기도 했었다.
사실 어린 날에 내가 인식하고 있던 못생긴 노각은 오이 줄기에서 하루하루 늙어가는 게 보이던, 내년에 쓸 모종 씨앗 확보를 위해 고이고이 모셔두고 살피는 귀중품이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집안이나, 동네 구석구석에서 발동하는 호기심에 저지레를 심심치 않게 저지르는 내게 어른들은 절대! 절대! 씨노각엔 손을 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었다.
그냥은 먹지도 못하는 노각을, 유독 그것만 따지 말라고 하셨던 어른들의 당부에 나는 청개구리 심뽀가 발동했던 것 같다. 굳이 동생들과 노각을 한 개씩 들고 칼싸움을 하다가 깨지거나 터지면 소죽 간에 있는 엄마소에게 껌으로 주었는데 어떤 날은 엄마소가 완벽하게 먹지 않아 완전 범죄가 되지 못해 어른들께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할머니는 해가 짧아질수록 자주자주 덤불을 들춰 호박도 오이도 부지런히 찾으려고 애를 쓰셨지만 구석구석에 숨어 숨바꼭질을 하느라 절대로 찾아낼 수 없던 녀석들은 줄기가 말라버리고 서리가 내려 이파리가 초라해져야 싸그리 찾아낼 수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마지막 오이까지도 우리에게 찾아내라 부탁하셨고 고이고이 데려다 장에다 헐값에 넘기기도 하시고 자주 가시는 가게에 덤으로 주고 오시기도 했는데 할머이 보다 눈이 더 밝았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칼싸움으로 공놀이로 오이와 호박을 따다 없앴었다.
몸 값을 자랑하시는 대파 대신 청양고추를 넣은 노각볶음을 먹으며 어렸을 적 첨 맛보았던 그날과 맛을 떠올려 본다.
입병이 난 손녀와 어린 손주들을 위해 꽁꽁 숨겨두고 고이고이 영글어 가길 바랐던 노각을 이때다 싶은 그날에 다래끼에 담아 집으로 걸어오셨을 할머니의 발걸음. 그리고 오이껍질과 파낸 씨는 엄마소에게 먹이고 속살은 어린 손주들에게 먹여주셨던 할머니의 알뜰하셨던 손길을 너무도 당연하게 알았던 철부지 손녀. 오이며 노각이며 호박을 할머이 속도 모르고 아까운지도 모르고 엄마소에게 인심 쓰던, 진짜 징글징글하게 말도 안 듣는다고 혼내던 엄마의 목소리가 창밖의 매미소리 맨치로 귓가서 맴맴 도는 부끄러운 오늘 저녁밥상이다. 그러게나 말이다. 나는 진짜 왜 그렇게도 말을 안 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