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와 호박이패리
나의 호박잎 이야기 주절주절
누가 심었을까?나의 밥벌이 길목엔 초등학교가 있는데 한 날 누군가 억센 잔디풀이 빼곡한 경사로에 호박 모종 두 포기를 심은 것을 보고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사진 촬영을 해놓았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만난 호박 모종은 아침 이슬에 세수한, 햇볕에 반짝이는 파랜 얼굴을 보여주었고 퇴근길엔 마치 내 몸뚱이처럼 피곤해 보이는 시들시들한 얼굴이었지만 나의 퇴근을 축하해 주었다.
과연 누가 따 갔을까?시간이 흘러 장마철이 되었고 예측할 수 없게 퍼붓는 빗줄기에 쫓겨 정신 없이 걷느라 한 동안 호박 모종에 무심했는데 한 날 갑자기 거짓말처럼 비가 개이고 해가 쨍하고 얼굴을 보여주어 당황스럽던 퇴근길에 호박 덩굴이 이리저리 들춰지고 호박잎들이 막 뜯겨나간 것을 보게 되었다.
'비가 개인 틈을 타 호박주인이 쌈 싸 먹으려고 뜯어 갔겠지? 만약 아니라면 퍽 난감인데'
나는 그 장소에 호박 모종을 용기 있게 심은 분이 대단하시단 생각을 내내 했었고 뜯어간 분은 더 대단타는 생각을 하며 부디 바람이 있다면 두 분이 동일인이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야야 누가 있나?"
"할머이 왜?"
"니 내하고 자밭에 호박이패리 따러 안 갈래?"
"호박이파리는 왜? 토끼 줄라고?"
"이잉 토끼는 무신. 지녁상에 물라 그라지"
"에이 할머이도 참 호박이파리를 우뜨케 먹어"
"니가 안무 봐서 그라제 맛보고 더 달라하지나 마래이"
할머니를 따라 자밭에 간 나는 널따란 양탄자처럼 펼쳐 있는 호박잎들을 보고 혼란이 왔다.
"할머이 이래 많은데 이걸 다 따?"
"요래요래 안 윽씨고 윤한것만 골라 따야지"
할머니는 초록색 양탄자가 되어 있는 호박잎들 사이에서 연두색을 띠고 있는 연한 아이들만 찾아 뚝뚝 꺾어 다래끼에 담으셨고 가지랑 대추랑 탱자나무만 가시가 있는 줄 알았더구먼 호박이파리에도 까끌까끌한 잔털 가시가 잔뜩 묻어 있는 것을 안 나는 얼얼한 손가락을 만지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호박잎 양탄자
"할머이 이 호박이파리 우뜨케 해 먹을 기여?"
"우째 묵긴 요래요래 윽신 껍데긴 삐끼가꼬 푹 찌서 쌈 싸 묵지"
"뭐 느가꼬 쌈 쌀 낀대?"
"무 느킨 느 애미가 잘 맹그는 쌈장에다 싸 묵지"
"아 그러쿠나"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엄마표 쌈장은 집된장에 생마늘이랑 풋고추를 숭숭 썰어 넣고 고추장과 매실청 조금 그리고 참깨 팍팍, 들기름을 부어 버물버물 버무려주는 쌈장인데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나는 고추와 마늘은 먹지 못하고 뜨거운 밥에 된장만 묻혀 먹었는데 밥에 감자를 넣은 날엔 쌈장을 감자에다도 묻혀 먹었는데 내 입엔 맛이 참 좋았다.
"호박이패리 따느라 고생했는데 자 니도 하나 무보래이"
"아니야 나는 안 먹을래"
"이잉 무보고 더 달래지나 말고 자 하나만 무봐. 니 동상도 이래 잘 묵잖나"
내가 우주선이라 부르는 접혔다 펴졌다 하는 찜기에 올려져 찐 초록색을 띠고 있는 호박잎을 가족들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쌈장을 품은 동그란 보따리를 만들어 연신 입에 쏙쏙 넣어 맛있게 먹었지만 나는 호박잎에서 나는 특이한 향이랑 아까 호박잎을 따러 갔을 때 손을 얼얼하게 긁던 느낌이 계속 거슬렸다.
"우엑 나는 안먹을래. 호박이파리 느낌이 애나 혓바닥 같애"
애나는 우리 집 고양이었다.
산과 들로 도랑으로 강으로 오만데를 쏘다니며 이것저것 잘만 주워 먹던 산골 소녀는 산골 처자가 되었고 나는 그 당시 뭔 정신머리에 용기였는지 삼복더위 중 말복이 끼어 있던 광복절날 시댁에 첫인사를 가게 되었다. 친정엄마는 더운 날 예비시댁을 방문하는 내가 내내 걱정이 되신 지 눈치껏 하라는 당부를 몇 번이나 주문하셨고, 남자친구와 우리 부모님과는 식당에서 첫인사를 한 것과는 달리 예비시댁에서의 첫 식사는 마치 사전테스트 같아 퍽 긴장되고 부담스러웠다.
예비 시어머니는 오느라 고생했다며 점심상을 차리셨고 나는 눈치껏 돕는 척하고 있었는데 대박! 아까부터 가스불 위에서 흰 김을 솔솔 내 뿜고 있던 커다란 냄비 뚜껑이 열리고 보인 것은 고기반찬이 아니라 내가 우주선이라 부르는 찜기 위에 올려져 있는 시퍼런 호박잎이었다.
"많이 들어요"
"네에..."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나는 그날 정말, 꽤, 많이, 상당히, 억수, 허벌 당황스러웠다.
내가 살면서 지금까지도 억울하리만큼 많이 듣는 이야기가 소도 때려잡아먹게 생겼다인데 개고기도 홍어회도 장어탕도 아닌 호박잎 앞에서 무너지게 생겼다니. 게다가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예비시부모님과 남자친구가 호박잎을 젓가락으로 집더니 쌈을 싸는 것이 아니라 된장찌개에 푹 담가 샤부샤부처럼 적셔 드시는 것이었다. 나는 예비시부모님 앞에서 밥 잘 먹는 예비며느리가 되고 싶은 의욕은 뿜뿜이었지만 차마 호박잎을 된장찌개에 담그진 못하고 그냥 입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었고, 특유의 향을 머금은 호박잎이 입안에서 뱅뱅 돌며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진 못하고 입안에 머물고 어쩔 수 없이 꿀꺽 삼키자 호박잎의 그 까슬까슬한 느낌이 입안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쓰윽 청소를 하고 지나가는 특이한 느낌은 나의 식도 길이를 알게 해 주었는데 정말 최최대박은 애나 혓바닥 느낌이 아닌 가끔 가제트 혀로 내 팔뚝을 쓰다듬던 거친 사포 같던 엄마소의 혀 느낌이었다.
맛있게 드세용~억지로 호박잎을 먹은 덕분이었을까? 나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당했고(?) 지금도 정말 의문인 것은 시어머니는 그 뒤로 나에게 호박잎 쌈을 다시는, 단 한 번도 해 주신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매번 고기반찬을 해 주시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인데 첫인사 때는 서운하리만큼 왜 그러셨을까?
그리고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나는 가끔 아파트 계단 신호등 앞에 작은 우산을 펼치고 그때그때 수확하신 콩 한 공기와 고구마순, 노각, 토란, 호박잎을 진열하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고 계신, 마치 우리 할머니 같은 채소 할머니가 나오신 날엔 그곳에 들러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 쫑알쫑알 인사를 드리면 할머닌 틀니 웃음과 등 뒤로 감춰 두신 못생기고 꼬부라진 오이나 청양고추 몇 개를 덤으로도 주셨고 그날엔 부지런히 엄마표 쌈장을 만들어 호박잎 쌈을 먹을 수 있었다.
코 찔찔이 시절,
시댁에 첫인사를 갔던 날.
그땐 호박잎 쌈이 색도 향도 식감도 정말 정말 별로였는데 이거시 갑재기 마시써 진 것은 무슨 조화일까?
나는 지금도 가끔 친정에 들르면 호박잎 양탄자에 들러 연한 잎들을 따서 오곤 하는데 호박 덩굴 앞에서 서성 거리는 내 등너머로 남편 목소리가 들려온다.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니까"
"무슨 말?"
"딸들은 시집감 다 도둑년 된다고"
내가 휙 하고 돌아서 눈을 흘기자
"장모님 ○○이가 저 째려봐요"
내가 돌을 찾아 집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다음 상황을 간파한 남편이 후다닥 달려 멀어졌고 내 곁에서 함께 호박잎을 따시던 엄마가 당황하시고 부끄러우신 듯 사위 한 번 나를 한 번 보시곤
"저런 저런"
내게 레이저 눈총을 발사하셨다.
엄마는 손으론 계속 똑 똑 바쁜 소리를 내며 호박잎을 모으고 계셨는데 혼자서 조용히 웃고 계시다 결국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한참을 웃으셨고 덩달아 나도 따라 웃었다. 엄마와 남편은 안다. 나의 팔힘과 조준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