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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Apr 21. 2024

야나할머니와 분유 깡통

강력한 기억의 힘

"어머이 오늘 장에 가요? 그럼 올 때 언나 분유 좀 한 통 사다주요"


"이잉 까막눈인 내가 언나 분유를 아나?"


"여 분유 깡통에 언나 얼굴이 있고 꼬부랑글씨로 써 있으니 잘 보고 가서 고대로 사 와요. 운진슈퍼에 가믄 있어요"




 살짜리 맏이에게 막둥이를 맡기고 밭일을 하러 간 엄마. 배가 고파 계속 칭얼거리는 동생에게 멀건 분유를 타서 달래고 있는 언니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할머니가 드디어 버스서 내리셨다.


"야야 니 한번 보래이. 마치맞게 사 왔는지"


할머니는 분유통을 언니에게 건네셨다.


"할머이 이거 아닌데, 막내가 먹는 건 이 통이 아니고 이 통인데"


"뭐 소젖이 거서 거지. 언나 우니 얼른 따 갖고 미기래이"


언니는 할머니 말대로 막내에게 오랜만에 정량을 지켜 탄 젖병을 물렸다.




희한도하지.

분명 막내가 먹은 양은 기껏해야 젖병 한 통이었는데 어떻게 저리도 어마무시하게 토하는 것일까? 할머니가 사 온 분유를 먹고 트림을 하기도 전에 막내는 분수토를 시작했고 울면서 쏟아지는 토 때문에 울음소리가 끊어지고, 얼굴은 빨갛다 못해 까매져 마치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언니는  암담한 상황에 평정심을 잃고 눈물을 흘렸고 덩달아 나와 여동생까지 우리 사 남매는 모두 울고 있었다.


오늘따라 암만 기다려도 들에서 오시지 않는 엄마를 야속한 맘과 걱정의 맘으로 동동거리고 있던 긴긴 시간. 울다 토하다를 반복하던 막내는 얼마 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촉촉이 적시고 잠이 들었을 무렵 드디어 엄마가 오셨는데 엄마 얼굴을 보는 순간 느꼈던 반가움과 두려움.




마루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수건과 옷가지들, 치우지 못한 난장판이 된 마루, 큰누나 등에 업혀 기운 없이 잠든 늘어진 막내를  엄마는 직감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시고 언니의 등에서 부랴부랴 동생을 떼 내 안으셨는데 너무 많이 운 탓에 자면서도 흐느끼는 잔울음이 것을 확인하시곤 순식간에 호랑이 눈빛으로 돌변하셨다.


언니가 울먹거리며 이 모든 과정과 상황을 설명하자 엄마는 새 분유통을 쳐다보시곤 왜 묻지도 않고 아무거나 막 먹였냐며 막내를 안고 남은 한 손으로 언니와 나의 등짝과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하셨는데 지금 다시 떠올려 봐도 진짜 척추뼈가 부러지지 않게 맞은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씨게(세게) 맞았다.


엄마에게 한 대라도 덜 맞고 싶었던 나는 잘못했다고 두 손 모아 싹싹 빌었지만 고집불통 언니는 입을 꽉 다물고 선 채로 엄마의 매타작을 버텼, 엄마의 성격상 우는 소리를 내면 더 때리시는 분이었기에 언니는 정말 찍소리도 하지 ,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모를 운동신경이  발동된 나는 진즉에 대문간 너머로 도망을 쳤다.




글을 읽을 줄 몰랐던 할머니가 사 온 분유.

애석하게도 매일과 남양 두 분유회사의 깡통엔 아기 얼굴이 비슷하게 박혀 있으니 헷갈릴 만도 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 딸들이 뭔 죄가 있다고 그리 때리셨는지. 대문간 밖 까지 들리는 우는 잠꼬대를 하는 막내와 씨게 매타작을 당한 언니 걱정, 할머니가 잘못 사온 분유 한 통이 몰고 온 이 모든 상황, 나는 엄마가 그날 정말로 미웠다.


부모님은 그 뒤로 할머니를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분유 부탁을 하지 않으셨고 그날은 이웃집에서 분유를 몇 숟가락 얻어다 먹인 걸로 기억하는다음날 엄마는 막내를 시내 병원에 가셨다. 그리고 그 잘못사온 분유는 장이 튼튼한 여동생이 한 숟가락씩 입에 넣고 녹여 먹었고 우유를 먹으면 여지없이 설사를 하는 내겐 그림의 떡이었다.




그렇게 동생 덕분에 생기고 늘어난 분유 깡통들. 

할머니는 그 깡통들을 거꾸로 엎어 놓고 굵은 못과 망치로 물 빠짐 구멍을 내고 흙을 담아 쌈 채소 씨앗을 뿌리셨는데 똑같은 아기 얼굴을 하고 있는 괴기스러운 깡통들은 마당 꽃밭 앞에서 가지런히 줄을 서 꽃들과 키 경쟁을 하 듯 잎들을 워내며 할머니 도시락과 우리들의 밥상에 올라왔다.

지금도 기억이 크게 남아있는 채소는 상추랑 감낭잎처럼 뻑뻑하고 시퍼런 이파리를 가진 쌈이었는데 그 잎을 약이라 드시던 할머니 입가로 찐 초록색 물이 살짝살짝 보일 때면 나는 할머니가 누에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겐 진짜 냄새조차도 맛이 없던 , 아마도 케일류였던 것 같다.




아직도 친정 집에 있는 분유 깡통


수원 화성행궁 나들이에 나섰다가 식당 골목에서 역사를 자랑하는 가게 앞에 깡통에 제라늄을 심어 꾸민 화단을 보다 오래전 우리 집 화단 앞을 지키던 분유 깡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항상 드는 생각 육상선수 출신인 엄마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달린 연마들로 발달된 나의 달리기 실력은 다행이라 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그 사건 이후 사십 년도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언니는 여전히 도망도 안 가는 고집불통이다. ^^




지금도 우리 사 남매가 모두 모여 있을 때면 막냇동생에게 분유를 정량대로 먹이지 못해 배를 곯아 지금도 식은땀을 흘린다며 눈물짓는 우리 엄마. 

그 어린것들에게 애를 보란 짐을 맡기고 매타작을 하셨던 것을 지금껏 사과하시는 "눈물의 여왕" 우리 엄마계신.

그 시절의 어린 엄마도 육아에 들일에 시부모에 시동생들 양으로 힘이 부쳐 그랬던 것이니 이젠 그만 잊으셔도 된다 아무리 말해도 엄마는 쉽게 그 미안함의 주머니를 비우지 못하시고, 우리들에게 못해 준 것들만 생각나 미안 타시며  대신 손주들에게 아낌없는 사랑대포를 쏘고 계신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과연 그 젖배를 곯은 아들이 군에 가서 씨름왕이 되어 내무반에 큰 텔레비전을 기증하고 전역을  것과 지역에 힘 꽤나 쓰는 사람들이 모여 기량을 겨루는 대회서 일등 장군이 된 것은 유전의 힘일까? 후천적인 노력일까?




깡통에 심어진 제라늄과 날이 따스해지면 비어 있는 깡통들도 채울 이름 모를 화초들을 기대하며 사진을 찍어왔다.


그리고 엄마한테 말해주고 싶다.

그만 그 미안함의 주머니를 비워버리시라고. 그리고 엄마로 인해 빨라진 나의 달리기 실력으로 학창 시절 운동회 날과 체육대회에서 나는 늘 에이스였고 동문 체육대회에서도 모든 경기에 섭외 1순위였다고. ^^


집에 있는 분유 깡통이 이래 기억을 소환해다 줄 줄은 몰랐다. 기억의 힘은 참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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