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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Jul 21. 2024

야나할머니와 들깨 밭

기억

꽝꽝 말라버린 땅

지나간 주말.

시댁에 들깨 모 심는 것을 도와 드리러 다녀왔다.

비가 내려 촉촉한 땅이었으면 일하기가 수월했을 텐데 가뜩이나 가뭄으로 달궈진 땅에 또 장마도 시작된다고 하여 맘이 급했다. 곡괭이로 캐어야 간신히 뽑히는 모종을 추스르는 일부터 새벽부터 쏟아지는 7월의 햇살, 비를 몰고 오고 있는 뜨거운 바람에 작업은 쉽지 않았다.


앞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맞은편 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사연으로 치자면 좀 미깔 맞은 뻐꾸기긴 하지만 올해도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과 손이 스칠 때마다 향을 내어주는 들깨 향에 흥얼흥얼 노래가 튀어나왔다.


"뻐꾹뻐꾹 봄이 가네 뻐꾸기 소리 잘 가란 인사 복사꽃이 떨어지네

뻐꾹뻐꾹 여름 오네 뻐꾸기 소리 첫여름인사 잎이 새로 돋아나네"


"엄마 아직도 그 노래를 기억해?"


나와 2인 1조로 일을 하고 있던 작은 아이가 물었다.


"그러게 일부러 외운 건 아닌데 그냥 튀어나오네"


"엄마 기억력 짱인데"


"그래서 메모리 초과라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을 못 하는거여"




아~ 다 심었다.

"내보다 한 발 앞서 나가믄서 요래요래 잘 추스리가꼬 두 개나 시개씩 쥐 쥐문 된대이"


나는 오늘 할머니를 도와 담배밭에 들깨 모를 심기로 했다.


참매미가 절정으로 우는 7월 중순이 되면 옥수수 대공 다음으로 키가 큰 담배싹에 매달려 있는 큰 담뱃잎이 밑에서부터 한 잎 두 잎 줄어들기 시작해 몇 잎 남겨 놓지 않을 즈음이 되면 담배 밭에는 콩이나 들깨 모를 심는다. 올해 우리 집은 들깨 모를 심기로 결정했고 작은 밭에서 키가 한 뼘 자란 모종을 솎아 나는 호미질을 하실 할머니에게 모종을 제공하는 임무를 맡았다.


"기랙지가 비슷한 것 끼리 쥐 준나. 느므 쪼맨한게 껴 있음 마들게 커서 비리"


어디서 그렇게 빠른 속도가 나오시는 건지 쪼그리고 앉아 호미를 든 할머니는 엄청난 실력으로 나를 쫓아오셨고, 들쭉날쭉 자란 모를 두 개나 세 개 쥐어 드리기에도 바쁜 나에게 비슷하게 기럭지까지 맞춰 달라시니 양손이 바쁜 나는 계속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잘하네. 손이 야무지기도. 올해 들깨 농사가 잘 되겠대이 히힛"


할머니는 밭이랑을 거꾸로 걷고 있는 내가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플만할 즈음이 되면 기가 막히게 나를 칭찬하셨고, 나는 그 칭찬 때문 투정도 부리지 못했지만 또 힘을 얻어 더 열심히 모종을 골라 할머니에게 손을 뻗었다.




"너 완전 들깨 머신이야. 나랑 귀촌해서 농사짓지 않을래?"


나에게 들깨 모종을 쥐어주는 작은 아이에게 호미질을 하던 내가 말했다.


"엄마 머신이 아니고 머슴이겠지"


나는 작은 아이의 대답에 밭이 떠나가라 웃으며


"예전에 엄마가 초등학생 때 야나할머니하고 지금 너랑 나의 포지션으로 들깨 모를 심었었어"


"그때도 들깨를 심었다고?"


"그럼 그땐 더 많이 심었어. 이 정도면 워밍업이지"


"엄마 근데 좀 뜨거운 거 빼곤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채워지는 밭을 보니 뿌듯함도 있고"


"그래서 엄마가 머리 복잡할 때 마늘 까고 멸치 똥 따고 그러는 거야."


"어 그러고 보니 엄마 요새 뭐 안 하네?"


"응 그건 더 이상 깔 마늘도 똥 딸 멸치도 없어서 그래"


"엄마 그럼 내가 사줄까?"


"아니 맘만 받겠어"


"아니 엄마 진짜로 사줄게"


"아니 이젠 방법을 바꿀 거야. 냉동실도 꽉 찼고 내가 골병이 들어서 안돼"




오후부터 정말 어마무시하게 내린다고 삼일 전부터 호들갑을 떨던 장맛비는 다행히 밭일이 끝날 때 까진 참아 주었고 점심을 먹은 뒤 낮잠을 자는 도중에 내리기 시작했다. 한참 뜨겁던 땅도 식고 모종이 땅에 뿌리를 잘 내렸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창 밖을 바라보는데 기상청이 겁을 먹고 호들갑 떨만했다. 비가 내려도 어떻게 이렇게 무섭게 내리는지. 저렇게 세게 내리는 비는 맞으면 따끔거릴 정도로 아픈 비다. 마치 동남아에 와 있는 것 같고 쩍쩍 갈라지는 번개를 치는 하늘을 보며 그간 지은 죄가 많아 혹시 벼락을 맞으면 어쩌나 살짝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한참 퍼붓는 비를 보고 있자니 비노래가 아닌 하루 종일 귀벌레가 들렸던 뻐꾸기 노래계속 입에서 나온다.


"뻐꾹뻐꾹 봄이 가네 뻐꾸기 소리 잘 가란 인사 복사꽃이 떨어지네

뻐꾹뻐꾹 여름 오네 뻐꾸기 소리 첫여름인사 잎이 새로 돋아나네"


그때도 울었고 지금도 울고 있는 뻐꾸기와

그때도 심었고 지금도 심고 있는 들깨 

그때는 할머니와 내가, 지금은 작은아이와 내가 2인 1조가 되어 심는 들깨


시간은 흘러도 지속되는 일이 있고,

시간이 흘러도 기억되는 노래가 있고,

시간이 흘러도 들리는 뻐꾸기 소리가 있다.


먼저 세상을 등진 아들을 잊으려,

허망하게 떠난 딸을 잊으려,

장맛비 속에 떠난 남편을 잊으려,

들에서 산에서 쏟아낸 할머니의 수많은 빗방울들을 떠올리며 비가 들이치는 커다란 거실유리창이 마치 할머니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긴 시간이 지나도

내가 할머니를 기억하는 것처럼

나를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있을까?

비 오는 창밖을 보다 갑자기 무섭고도 궁금한 질문을 던져본다.

그리고 천둥은 무섭지 않은데 번개는 무섭다. 보는 것이 듣는 것보다 무서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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