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바라기 Nov 02. 2024

야나할머니와 염소똥 꽃

염소똥 꽃은 분꽃

길을 걷다 분꽃을 만났다.

수없이 지나치던 그 길이었는데 꽃이 피기 전까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본 분꽃인지. 반가워 울컥 눈물이 났다. 어린 시절 시골집 마당에 늘 자리 잡고 있던, 염소똥 꽃이라고도 하고 귀걸이 꽃이라고도 했던 분꽃 씨가 까맣게 영글어 가고 있는 것에 가슴도 벅차올랐다.

어린 시절 나의 귀걸이

어린 시절 우리 집엔 귀를 뚫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귀를 뚫은 친구엄마가 마실이라도 오시면 귓볼에 붙어 있는 노란 금 귀걸이가 신기해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서울서 온 고모의 귀에서 반짝, 달랑거리는 귀걸이가 어찌나 탐이 나던지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귀걸이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엄마에게 등짝을 맞아가며 여동생과 립스틱을 훔쳐 바르고 할머니 메뉴퀴어를 작살내던 그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귀걸이였는데 운동회에 온 아저씨가 파는 장난감 귀걸이도 언감생심인데 진짜 귀걸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할머니가 사 온 양말 끝에 달려 있던 코핀을 귀에 달고 턱에 한껏 힘을 주고 다녔는데 그땐 코핀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어서 정말 애지중지하던 소중이 친구였다.


"니들 내 귀고리 달아주래?"


귀걸이라는 말에 동생과 나의 귀가 번쩍 열리고 눈이 반짝거렸다.


"할머이 귀도 뚫을 수 있어? 근데 귀걸이가 없잖아"


"없긴. 마당에 저래 지천으로 널맀는데"


동생과 나는 마당을 두리번거리며 귀걸이를 찾았다.


"에이 할머이 거짓부렁. 마당에 아무것도 없는데"


"없긴 요 있잖나"


할머니가 웃으며 걸음을 멈추신 곳은 염소똥 꽃 앞이었다.


"자 봐 보래이. 요래 하믄 귀고리가 되지"


할머니는 이제 막 모양을 갖춘 분꽃 씨앗을 조심조심 당겨 긴 꽃 속에 숨어 있던 하얀 암술대를 끌어올리자 고모의 귀에서 달랑거리던 긴 귀걸이처럼 키가 늘어났고 막 영글어 가는 연두색 씨를 내 귓바퀴에 걸쳐 놓자 어깨 위로 달랑달랑 흔들리는 예쁜 귀걸이가 되었다.


"우와 할머이 정말 귀걸이가 되었네"


양쪽에 귀에 자주색 귀걸이를 달고 조심조심 걸어 다니는 우리를 보고 할머니는 웃고 계셨고 생각보다 금방 시들고 끊어지는 귀걸이 때문에 우리 자매는 염소똥 꽃 앞에서 계속 분주하게 움직였다.




큰 아이가 일곱 살 때 우리가 살던 집은 복도식 아파트 꼭대기 층이었다.

총 여덟 가구가 살았는데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 바로 옆인 5호였고 밤 새 엘리베이터가 오르락 거리는 소음이 있는 것과 수압이 낮아 샤워기서 공허한 바람만 나오는 것, 장마철에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총 쏘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 겨울철 옥상에 쌓인 눈들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마치 지진이 나는 것 같은 굉음에 천장이 흔들리는 것 말고는(넘 많나?) 참 좋은 보금자리였다. 특히나 좋은 기억은 그 라인에 살던 여덟 가족들이 얼마나 감사한 이웃이었는지, 늘 상 복도문을 열어 놓고 살다 보니 자연스레 공동육아가 되었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찐 옥수수와 고구마가 다시 홍시가 전해지고 전해지는 정 넘치고 따듯한 넉넉한 복도였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했나 싶을 정도인 고만고만한 아들네미들이 팬티만 입고 씽씽카를 타고 복도를 씽씽 누볐는데 그 모습조차도 귀엽다고 봐주시던 맘 좋고 고마운 이웃들이 살고 계셨었다.


8호엔 큰 아이와 나이가 같은 7살 둘째를 둔 언니가 사셨다. 언니의 최고 장점은 부지런함이셨는데 집은 언제나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했고 패션 감각도 남다르셨고 정말 신기했던 것은 그 어떤 순간에도 언니의 쌩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단아하고 예쁜 언니를 보며 나는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무조건 기럭지가 뒷받침이 되어야 미모도 패션도 완성이 되는 거라고 말했었는데 하루는 둘이서 아이들 내복을 사러 2001 아울렛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OO엄마 OO엄마는 왜 화장도 안 하고 본인을 안 가꿔?"


"게을러서 그런가 봐요"


"젊은 사람이 왜 그래. 그 이쁜 얼굴 다 감추고. 제발 무채색 티 좀 입지 말고 예쁜 옷도 사고 화장도 하고 그렇게 살아. 가끔 OO엄마 보면 답답할 때가 있어. 말 나온 김에 오늘 귀라도 뚫자"


나는 언니 손에 이끌려 주얼리 샵에 갔고 주인아저씨는 내 귀에 점을 하나 찍더니 골라둔 귀걸이 침을 연장으로 뾰족하게 잘라 뿌직 하며 내 귓볼에 박아 넣었다.


"와 사람이 달라 보이네. 거울 좀 봐 얼마나 예뻐. 진작에 이렇게 좀 하고 다니지. 내가 다 뿌듯하네. 이 귀걸이는 내가 주는 선물이야"


언니는 나보다도 더 뿌듯해하셨고 나는 긴장과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얼얼한 맘과 귀로 집으로 돌아왔다.




얼떨결에 귀를 뚫고 오긴 했지만 밋밋하던 귀가 반짝이니 나름 만족감도 있고 뿌듯했다. 귀를 뚫은 것을 잊고 예전의 잠버릇으로 자다가 기함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귀걸이를 사서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고 차츰차츰 만난 이웃 엄마들이 나의 변화를 눈치채고 귀걸이 선물도 해 주본인이 쓰지 않는 금붙이 귀걸이들을 죄다 주신 통 큰 언니도 있었다. 과감한 시도를 한 나의 근황을 전해 들은 여동생은 귀걸이를 한주먹이나 들고 와 나를 감격의 도가니탕에 빠트렸고 마다 할머니가 화투장으로 재수 떼기를 하시던 것처럼 나는 귀걸이를 펼쳐 놓고 짝 맞추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귀가 빨갛게 퉁퉁 붓더니 바람만 지나가도 아프기 시작했고 결국엔 곪아 터졌다. 내 귀를 본 이웃들은 금으로 된 귀걸이를 하지 않아서라고 한 마디씩 아는 체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내내 금붙이를 달고 있었다. 병원에 가서 소독을 해도 그날뿐이었고 한 날은 탈의를 하다 귀를 건드렸는데 그때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핏방울이 한 시간이 넘도록 지혈이 되지 않아 귀를 붙잡고 있느라 저녁밥은커녕 아이들도 씻기지 못하고 남편의 퇴근만을 기다리던 황당한 날도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봤던 남편은 살성이 좋지 않아 그리도 뚫지 마라 당부했던 귀를 즉흥적으로 뚫고 와 고생하는 나를 타박했고 결국 나의 귀는 미운 흉터를 남긴 채 더디고 더디게 아물어 갔다.


신이 나서 앉던 화장대는 더 이상 재미가 없어졌고 짝 맞추기도 하지 않았다. 귀걸이 보관함엔 귀걸이가 아무렇게나 담겨 있었고 나의 용돈을 다 털어 넣으며 애지중지하던 그 작고 반짝이던 귀걸이들과 금붙이들은 동생에게 한 움큼 다시 전해졌다.




익어라 염소똥 꽃아


까맣게 씨가 익어가는 염소똥 꽃을 보니 할머니가 달아준 분꽃 귀걸이를 하고 기분 낸다고 신발장에서 엄마 구두까지 꺼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동생 마루를 걷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귀에 남은 흉터를 보니 대책 없이 귀를 뚫고 고생했던 일 년 반 이란 시간도 떠오르고 분꽃 꽃을 따 귀에 걸어주시던 할머니 미소와 자꾸 끊어지는 귀걸이를 만드느라 마당 구석이 빨개지도록 꽃잎을 따 버리던 철부지 나도 떠오른다.


다시 분꽃을 만나니 귀걸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촉을 틔우는 것 같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귀걸이를 하면 사람이 1.5배는 예뻐 보인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요즘 얼굴이 시커매 보인단 말을 하도 들어서 좀 더 이뻐 보이고 싶은 걸까? 그런데 낯빛이 어두운 건 순전히 찐한 가을볕에 추수를 하느라 그을려서 그런건데. O팡에 집게형 귀걸이라도 검색해 봐야하나?




바닥에 떨어진 꽃씨를 주워와 말리고 있다. 내년 가을 나는 분꽃을 또 볼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야나할머니와 주머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