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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Oct 26. 2024

야나할머니와 주머이

보물상자 같았던 주머니들

2024년 8월의 첫날

1층 사무실 사람들을 제외하고 2층 사무실 사람들이 죄다 휴가를 갔기에 나는 음악을 어 놓고 띵가띵가 근무 중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민원인 한 분이 들어오셨다.

잠깐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들어보니 업무담당자와 상의 없이 불시로 방문하시어 해결될 수 없는 민원이었고 그래도 발걸음 하신 그 수고를 외면할 수 없어 들고 오신 서류를 검토했더니 두 가지의 서류가 누락되어 있었다. 나는 다음에 약속하고 방문하실 땐 추가로 서류를 챙겨 오십사 메모지에 적어 드리려고 책상에 왔다가 민원인에게 다가간 순간 그분이 녹취 중이라는 것을 게 되었다.


"어머니 지금 녹취 중이세요?"


"네. 제 목소리가 들어가서 녹취해도 상관없어요"


"녹취를 하셔도 괜찮은데 저한테 미리 말씀을 좀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나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녹취를 듣고 서류를 꼼꼼하게 챙기려고 했을 수도 있으시겠단 생각에 기분 나쁜 티는 최대한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대고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선생님한테 화풀이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미안해요. 제가 워낙 여기에 쌓인 게 많아서 일부러 꼬라지를 부렸어요."


뭔가 사연이 있는 민원인인 것 같아 잠시 앉으시라 차를 한 잔 권하니 냉커피로 달라하셔서 서랍에 고이 모셔 두었던 캡슐을 내려 큰 종이컵에 얼음을 꽉꽉 채워 내어 드렸다.


"제가 그린피스 회원이라 종이컵 안 쓰는데"


"아. 좋은 일 하시네요. 저도 일회용품 안 쓰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괜찮아요. 차에 텀블러 있으니 가서 옮겨 담으면 되죠. 그리고 말없이 녹취한 것은 미안합니다. 지금 7분 30초 정도 녹취 했는데 이거 선생님 보는 앞에서 지울게요. 자 지웠습니다. 보셨죠?"


"아, 네"


민원인은 삼십 분 넘게 나에게 일 년이 넘도록 서운했던 일들을 쏟아 놓고 사라졌고, 나는 혼자 듣기엔 아까운 그 이야기를 들으며 사무실에 CCTV와 녹음기가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녹취 사건에 덜덜 떨리던 손끝은 잊히고 졸릴락 말락 한 퇴근 직전. 정신없이 지나간 아침의 일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참 솔직하고 쿨한 민원인. 그리고 '그린피스 회원'이라는 그분의 메시지.


한 2년 전쯤이었을까?

나는 집에 있던 플라스틱 용기들을 죄다 버리고 유리용기로 전면 교체했다. 하도 미세플라스틱 어쩌고 하는 말이 내내 거슬렸고 사실 진작부터 교체를 하고 싶었지만 유리용기들이 가격대가 있어서 한꺼번에 교체하기가 주저스러웠는데 환경에 관한 연수도 듣고 나의 최대 관심사인 자연재해 유튜브를 챙겨보면서 겁도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회용 비닐봉지와 장갑, 키친타월과 일회용 행주를 덜 쓰겠다는 일념으로 트레이더스서 면 행주를 왕창 샀지만 행주를 삶고 건조하는 일은 생각보다 귀찮았고,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나 우리 집엔 음식 배달 횟수가 점점 늘어 분리수거함은 넘쳐났는데 마트에 가도 죄다 일회용 포장용기에 야채와 과일들이 담겨 있어 분리수거를 하면서 매번 툴툴거렸다. 그냥 먹을 만큼만 본인이 가져간 장바구니에 담아 가면 안 되는 걸까?




"할머이 뭐 해"


"뭐 하긴 보믄 몰르나 주머이 맹글지"


"어다 쓸라고?"


"어다 쓰긴. 약초 뿌래기도 담고 대추도 담고, 밤도 담고 그라지"


"이 천을 언제 바늘로 다 꼬맬라고? 그냥 봉다리에 느믄 되잖아"


"놀민놀민 해야지 일이라 생각하믄 못 해. 여 바늘마다 실이나 질게 끼 다오. 니 그거 아나? 비니루 봉다리가 을매나 나쁜지. 하다 못해 버강지에 태워보래이 씨꺼먼 연기는 우째 그리 마이 나는지. 재에 뜰꺽 들러붙음 재도 못쓰지 밭에 나가 뒹굴믄 농사도 매해"


그땐 비닐봉지도 양파 자루도 귀하기도 귀했지만 할머니 방문 앞 처마 밑 빨랫줄에는 언제나 가지 각색의 면포로 만든 크고 작은 주머니들과 형형색 색의 보자기들이 만국기처럼 걸려 있었다. 그리고 더디고 더딘 할머니의 작업을 지켜보다 지겨워진 나는  도방구리에 길게 길게 실을 꿰논 바늘들을 꽂아두곤 쏜살같이 사라졌다.




"엄마 봉투 백 원 밖에 안 해 하나 사자"


"안돼"


"아 엄마 집까지 어떻게 들고 가냐고"


"한 사람에 두 개씩만 들어 그러면 갈 수 있잖아"


"아니 봉투 하나 사면 될 텐데 이걸 왜 손에다  들고 가냐고"


"오늘 갑자기 장 볼지 몰라서 내가 장바구니를 안 챙겨 왔으니 걍 들고 가자"


작은 아이와 나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남편이 제안한다.


"그럼 당신이 좋아하는 장바구니를 하나 사. 천 원이네"


그렇게 남편의 제안으로 모녀는 극적 타결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장바구니를 꼭꼭 접어 보관 장소넣었다.


"아니 엄마 장바구니를 모아두는 것도 환경보호에 위배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다음에 장바구니를 다시는 사지 않는다에 의의를 둘 거야 그리고 할머니도 갖다 드리지 뭐"


"엄마는 도라에몽이야 뭐든 담아두고 특히 핸드메이드 주머니나 바구니 엄청 좋아하고. 호호할머니 같아"


"내가 없이 살아서 그래. 없이 살아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작은 아이의 말이 맞다.

나는 주머니를 참 좋아한다. 바구니도 그렇다. 뭔가를 담고 지키고 보호하는 그 틀을 참 사랑하는 것 같다.


비록 한글은 모르셨지만 면포 주머니 겉에다 숯으로 뭔가 당신만의 표시를 해 놓고 주머니를 걸어 놓은 순서를 기가 막히게 기억하셨던 할머니의 지혜를 떠올리며, 녹취 사건 때문에 황당하긴 했으나 환경보호에 대해 다시 한번 찔림을 주고 가신 민원인에 대해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엄청은 아니고 약간? 세상엔 참 재밌는 일도 사람도 많다.




가족들을 살리고 이웃들을 고쳤던 할머니의 보물상자이자 마법 주머니들을  떠올리며 나는 앞으로 어떤 주머니들을 채우며 살게 될까? 문득 궁금해지고 기대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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