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좀 더 불면 하려고 했던 일이었는데 아이의 발등 부상 사건을 계기로 저녁을 먹자마자 가족들의 양말 서랍을 뒤집어 여름 내내 신어 헐거워지고 오염된 양말들을 추려내고 새양말들로 교체해 주었다.
"아따 우리 집 딸내미는 어디 탄을 캐러 다니는 건지 학교를 다니는 건지 양말이 전부 왜 이래?"
"학교 안 가고 탄 캐러 다니 나부지, 딸네미 덕분에 나도 내일부터 새양말 신는 거야?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아도새양말 신으면 기분이 좋더라"
양말 서랍에 양말이 가지런히 담긴 것을 보고 남편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치? 새양말이 주는 기분 좋음이 있지? 근데 우리 딸네민 이 좋은 기분이 며칠이나 갈라나"
"그걸 걱정하면 이지경까진 안됐겠지"
수북이 쌓인, 회생 가능성이 전혀! 일도 없어 보이는 흰 양말들을 바라보며 남편이 말했다.
"아니 관리할 능력도 없음서 왜 줄기차게 흰 양말일까?"
"그게 또 교복의 포인트지. 특히 흰 양말 신었을 때 기분 좋은 거 당신은 학창 시절에 안 느껴봤어?
그때 집이 좀 살거나 노는 애들이 양말로 힘을 주기도 했었지"
"고뤠에? 남고라 양말로도폼을 잡았나? 나는 특별한 기억은 없고 명절마다 새양말을 신고 기분 좋았던 기억이 있네"
"나는 결혼하고 나서나 명절날 새양말 신었지 클 땐 안 그랬어"
"에? 명절이라고 꼬까옷 입고 새양말 신고 안 했다고?"
"당신은 아직도 날 모르는구나. 나 막 자랐다니까"
"희한하네. 애가 넷인 우리 집도 설빔이나 양말은 기본이었는데 어찌 달랑 혼자 큰 당신이 찬밥이었을까?"
"나 그렇게 힘들게 컸으니까지금부터라도 구박하지 마"
"오구오구 그래셔쪄요? 어떻게 내 양말이라도 하나 더 넣어줄까?"
내가 무지갯빛 줄무늬가 프린트된 양말을 들어 보이니 남편이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남편에게 양보하려고 했던 냥말 ^^
할머니는 해마다 명절날 아침이면 우리 가족들에게 새양말을 선물해 주셨다.
이미 몇 주전부터 명절맞이로 바쁘셨던 할머니는 대목이라고 유난히 크게 선 오일장에서 식구들 머릿수대로 양말을 사 오셨고, 양말을 품은 그 까만 봉다리는 할머니방 흙벽에 박혀 있는 검은 못에 대롱대롱 걸려 명절날 아침을 기다렸다가 아침 세수를 끝낸 우리들의 손에 한 개 한 개 전달되었고, 언니가 입던 한복을 물려 입고, 또 내가 입던 한복을 동생이 물려 입는 일들이 해마다 반복되었지만 그래도 오로지 내 몫으로 제공된 할머니표 양말은 신는 순간부터 하루 종일 기분 좋은 선물이었다.
투명한 비닐에 담겨 빠지작빠지작 소리를 내며 나를 반겨주는 젊잖은 양말. 그리고 양말이 흐트러지지 말라며 집어 놓은 은색 빛의 작은 집게는 귀걸이를 너무너무 해 보고 싶었던 산골소녀의 갈증을 위로하 듯 내 귀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가 한참 놀다 의식하고 만져보면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가 태어나고 명절날 아침이면 시어머니가 우리 네 식구의 새양말 챙겨주셨다. 그리고 설날 아침마다 시아버지는 거실 안방 문 옆 벽에 아이들의 자란 키를 표시하시기 시작하셨고 아이들은 일 년에 한 번 밀린 숙제 검사를 받 듯 키를 재고 세뱃돈을 받는 재미에도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해였던가 하루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아이들의 발 사이즈를 가늠하시지 못한 시어머니는 아이들의 발 사이즈에 한 치수가 작은 크기의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양말을 사 오신 적이 있었는데 나의 찡긋하는 눈짓에 아이들은 척하고 알아듣고 양말에 발을 구겨 넣고 차례를 지냈다.
양말 한 켤레가 갖고 있는 추억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엄마가 그 일을 지금까지 대신하고 계셨기에 나는 명절 때마다 새양말을 신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인 줄 알았었다.
왜 하필 양말이었을까?
생각해보니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양말이라도 새것 신고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일 년을 보내라는 마음의 응원과 깨끗한 양말 신고 깨끗하고 좋은 곳에 발을 딛고 살라는 할머니의 마음을 담은 덕담이 아녔을까? 그런 마음이 든다.
예전엔 그 귀하던 양말도 요즘은 패션 때문에 맨발이 유행인 세상이 되어 그 기능을 잃은 면도 있지만 나는 구멍 나 꿰매 신고 천을 덧대어 기운 양말을 신던 그 시절이 문득문득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 시절 나의 양말은 왜 화산 분화구가 분출하 듯이 구멍이 쉴 새 없이 났는지...
아! 그리고 양말이 갖고 있는 정말 신기하고 신기한 힘.
어째서 딸아이의 양말은 늘 짝이 맞지 않는 것일까? 빨래를 개다가 맞지 않는 짝들을 확인하고선 양말 통, 세탁기, 건조기 안을 다 들여봐도 없는데 과연 양말들은 어디로 갔을까?? 크리스마스도 아니어서 양말 걸 일도 없는데 말이다. 아 그리고 양말 하니깐 생각난 일. 초등학교 삼 학년 때 내가 걸어 놓고 잔 꼬질꼬질한 나의 양말엔 분홍색 볼펜 한 자루와 백원이 들어 있었는데 그 산타는 우리 언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