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봤자 나는 쉽게 변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스쳐가는 사람이면 모두 다 내 인연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는 편이고, 그만큼 모든 관계에서 벗어난 혼자만의 시간을 또 즐기는 편이기도 하다. 그냥 시절인연 그 보다도 못할 수 있는, 지나쳐도 되는 사람들한테까지도 마음을 열고 주고, 이어나가곤 했다. 언제 다시 어떻게 만날지 모르니, 항상 예의바르고 매너있게 행동해야하는 것은 물론이요, 밝은 모습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 나에게 이득이 될 수도 있다는 계산적인 생각이 생각이 아니라, '카르마'를 믿는 편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깝겠다. 착하게 살자, 예의바르게 살자, 거짓말하지 말자, 다른 사람을 뒤에서 험담하지 말자, 칭찬을 많이 하자, 자주 웃자, 그래야 복이 오니까 말이다.
나는 꽤나 '좋은 관계'에 대한 집착이 있는 편이었던 것 같다. 연애할 때도 그랬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화를 내본 적도 별로 없고, 어지간한 서운함이나 불만은 내가 삭히거나 내가 맞춰서 해결하는 쪽을 택했다. 연애 뿐만 아니라, 친구나 가족에게도 그렇다. 기분 상하는 일이 있어도, 그냥 굳이 말해서 불편한 대화가 오고가는 것이 싫으니 내가 참고 맞춰주려고 했다. 감쪽같이 항상 괜찮은 척 웃어 넘겨서, 아마 대부분은 내가 기분이 상했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나 애매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당연히 그랬다. 연인이나 친구, 가족처럼 깨질까 두려운 관계조차 형성 되지 않은 사람들인데도, 나는 싫은 소리도 거절도 잘 못했다. 하다 못해, 너무 바빠서 쉬고 싶은 때가 있는데, 사람들이 언제 보냐고 계속 물어봐오는 탓에 약속이 있다 거짓말도 못하고, 피곤해서 못 보겠다 솔직하게 말도 못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 그 약속을 소화하곤 했다. 사람들이 좋은 것도 사실이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것도 사실이지만, 정말 한 순간도 피곤하거나 힘든 적이 없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내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나를 참 소홀히하고 산 것 같다.
깨닫는다. 밝고 긍정적이고 예의바른 사람, 매사에 열정적인 사람, 이 수식어를 놓아버리기가 뭐가 그렇게 아쉬웠던 것인지. 오히려 누군가가 오해하더라도, 니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하고 넘겨버릴 수 있는 깡을 기르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어차피 저 사람이 하는 생각은 나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니, 어떻게 생각하든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는, 내가 나를 잘 알아주니 괜찮다는 그런 마음을 기르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다.
나는 최근에서야 거절하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 거절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친구의 말에 힘을 얻어, 조심스럽게 약속을 거절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더 만들어가고 있다. 글쎄, 아직 "니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할 정도의 깡은 기르지 못한 것 같다. 아직도 나는 여전히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웬만해서는 내가 맞춰가는 쪽을 택한다. 아, 이래서 전에 잘 되어가던 남자가, 자기가 지난 10년동안 봤던 여자 중 제일 착한 것 같아서 좋다, 는 말을 했던 건가.
매년 시간이 흐를수록, 시절인연이라는 말에 대해 곱씹어보게 된다. 전에 오래 만났던 애인이 그랬다, 세상에 평생 친구는 없다고. 그냥 매번 그 순간마다, 그 상황마다 가장 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자주 볼 수 있고, 많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때 맺는 친구인거고, 상황이 달라지면 그 친구는 또 변하게 된다고 했다. 지금은 대학교 학과 동기들이 제일 친하지만, 취업하면 회사 동기들이 가장 가까울 수 있고,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고 나면, 옆 동에 사는 또래 애엄마가 가장 친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평생 친구가 있든 없든, 없다고 믿고 살아가는게 너무 슬프지 않아? 라고 물었었다. 설령 없다고 한들, 나는 있다고 생각하고 지낸다고 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30살에 새로운 친구를 사겨도, 60살이 되면 30년 우정이 된다. 나는 그런 우정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의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는 조금씩 알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이별이 무뎌질 수 있기 때문에, 더 마음이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사람은 왔다가 가는 존재니까, 너무 있다고 해서 행복할 필요도, 없다고 해서 우울해 할 필요도 없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