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팬 동기 누님과의 23시간
팬미팅 요청을 받았다.
나의 1 호팬은 대학교 동기 언니로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대학시절부터 누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누님을 만나는 시간은 즐겁지만 아무래도 돈 생각이 나지 않을 수는 없다. 내가 내려가더라도 교통, 숙박, 식비가 문제 되고 누님이 서울에 올라와도 마찬가지로 교통, 숙박, 식비가 걱정이다.
누님은 결혼해서 아들이 한 명 있다. 아들은 아직 몇 살이 아니고 몇 개월이라고 불러야 하는, '안돼'라는 말을 최근 하기 시작했다는 아기다. 누님은 얼마 전 남편과 다투었다고 한다. 주 1회 금요일에 회식을 하고 주말에는 스크린 골프를 치러 가는 남편에게 육아시간과 관련하여 언성을 높였다는 이야기다. 서울에 올라오는 누님은 육아도 남편도 없이 '어른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어른의 시간'
무엇을 해야 어른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호캉스를 하기로 했다. '어른=자본'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그리고 체력적으로 지쳐있을 누님을 위하여. 누님은 더현대 서울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더현대 서울 바로 옆에 있는 콘래드 서울에 예약을 했다. 평소 신랑과 가는 국내여행 숙박지는 모텔 아니면 홈쇼핑에 나오는 저가 패키지 호텔이다. 나는 누님을 위해 국내여행에서 머물러보지 못한, 내 생애 가장 비싼 1박을 예약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봤다.
누님과 알고 지낸 기간은 곧 20년이 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받고 많은 것을 주었다. 누님이 사는 지역에 내려갈 때는 숙식을 해결해 준다. 매 생일 때마다 서로 선물을 챙겨준다. 지난번에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당일치기로 제대로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아쉬웠다. 자주는 아니지만 생각날 때마다 연락하고 염려해 준다. 그러한 모든 것 보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누님이 대접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
누님은 돈을 쓰고 대접받는 것을 좋아한다. 누님은 한때 명품백을 사모았다. 사모은다고 해도 1년에 열몇 개씩 산다는 것이 아니고 형편에 맞춰서,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 것인가 싶게 샀다. 출산 후 명품백에 대한 관심이 적어졌다고 하길래 에르메스는 없지 않냐고 물었더니 에르메스는 직원과 친해져야 하고, 사고 싶지 않은 물건을 많이 사서 실적을 올려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수 없기 때문에 싫다고 답했다. 큰돈 쓰면서 왜 홀대받아야 하냐는 뉘앙스였다. 샤넬도 오픈런해서 줄 서서 들어가서 단 몇 분만에 물건만 딱 사고 나오는 것이 싫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큰돈을 쓰면서 대접받을 여유가 없어서 싫다는 것이었다.
그런 누님이 나의 첫 작품집(이랄까 개인소장용으로 만든 에피소드 8개짜리, 세상에 단 3권만 존재한다.)을 읽고 소비의 기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했다. 작은 물건을 여러 개 사는 것이 좋은지 모았다가 큰 물건을 한 번에 사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물어왔다. 나는 작은 물건을 여러 개 사는 편이다. 이마저도 나의 '작은' 물건과 누님의 '작은' 물건은 기준이 다르겠지만.(아주 많이 다르겠지만)
누님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누님은 220만 원짜리 고야드 가방을 들고 34만 원짜리 루이뷔통 트윌리를 목에 매고 150만 원짜리 브랜드를 듣지 못한 굽 높은 운동화를 신고 디디에두보와 또 다른 브랜드의 반지를 손에 끼고 나타났다. 그리고 집에 가기 전 신세계 백화점에서 80만 원짜리 아우터를 사면서 '마음에 드는 옷은 있을 때 사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아, 얼마 전 차량은 BMW로 바꿨다고 했다.
이렇게 서술하면 사치스러운 여자로 보인다. 누님은 부자가 아니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사치를 부리는 여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님은 좋은 물건을 사서 오래 쓴다. 저 220만 원짜리 고야드 가방은 2년 전에 180만 원에 구매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가 더 올랐다고 좋아했다. 소중한 아들의 기저귀 가방으로 쓰고 이제는 개인 가방으로 사용 중이라고 했다. 부피가 엄청나게 커서 많은 물건이 들어가는 가방이다.(손잡이가 끊어질 것 같다고 하지만 실제로 끊어지면 브랜드에서 수선해 주겠지?) 34만 원짜리 루이뷔통 트윌리는 7년 전에 24만 원에 구매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단종되어 구하지 못한다.(누님은 루이뷔통 매장에서 단종되었다는 직원의 말에 매우 기뻐했다. 가지고 있는 가방 몇 개도 단종된 것이라며 희소성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매장에서 팔고 있는 트윌리보다 누님이 매고 있는 단종된 트윌리가 더 예뻤다. 운동화는 모르겠고 디디에두보 반지는 누님이 5년 전에 결혼할 즈음 산 것으로 알고 있다.
누님은 소비의 품목이 명품이나 패션 쪽으로 집중되어 있다. 10년을 기준으로 소비 금액을 더해봤을 때 누님이 쓴 돈이나 내가 소비한 돈이나 총금액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지 나는 명품이 아니고 게임기나 가전제품, 다이빙 용품, 고프로 등등 다양한 제품을 많이 샀을 뿐이다. 나는 명품 구매 한 번 없이 마이너스 몇 천을 만들어 본 사람이다. 누님의 소비를 보면서 생각했다. 차라리 명품을 사서 오래 쓰는 것이 대외적인 이미지도 만들면서 중고 가치도 챙길 수 있는 방법일 수 있겠다고. 나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고 나이도 먹어가고 있으니 조금 더 직장인 다운 모습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이번 누님과의 23시간은 나의 기준에서는 매우 비싼 하루였다. 그러나 누님을 위해 1년에 한 번이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소비할 수 있었다. 앞으로 몇 달간은 7만 원씩 용돈에서 차감하여 할부를 갚을 테지만, 이 일을 계기로 '친구모임'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통장에 모인 돈으로 1년에 몇 번은 사랑하는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누님은 나를 보며(정확하게는 글이지만), 나는 누님을 보며 소비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