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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Feb 16. 2024

1막 11장. 낯선 보금자리에서 새로운 삶을.....

날이 밝자 엄마는 서둘렀다.

기도원에서 식사 등의 일을 돕던 이집사님이 내 손에 삼천 원을 쥐어주자 엄마는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하다 가벼운 몸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이집사님의 성화를 못 이긴 에 내 장난감 플라스틱 꽃게 지갑 거금 삼천 원을 꼬깃꼬깃 안전하게 넣어 둘 수 있었다.


내가 첫날 이곳에 왔을 때, 그리고 어젯밤 엄마를 태우고 왔던 지프차에 몸을 싣고 산속에서 나와 진해를 거쳐 마산시내 시장 입구에서 엄마와 함께 내렸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바쁜 걸음으로 시장길을 걷다 '부르뎅'이라 쓰여 있는 아동복 가게에 들어가 목 중간쯤 올라오는 하얀 폴라티에 검은색 골덴 재질의 바지와 자켓, 목도리 세트를 사서 값을 치렀다.

목도리 양쪽 끝부분엔 빨간 실로 가장자리를 덧댄 주머니가 있는 목도리가 포인트였다.

그리고는 곧장 근처 동네 목욕탕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 피부 껍질이 벗겨질 만큼 때를 박박 벗겨내더니 입고 왔던 옷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시장에서 사 온 새 옷으로 갈아입힌다.

근처 식당에서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한 후, 내 손을 잡은 엄마는 외삼촌 집으로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들어간다.

우리 모녀를 보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외숙모와는 달리 외삼촌은 이제 마음이 놓인다며 오늘처럼 즐거운 날이 언제였느냐는듯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채 들떠 있었다.

하룻밤 자고 가라는 외삼촌의 간곡한 부탁에도 엄마는 뭐가 그리 급한지 외삼촌 집을 나와 마산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한다.

타는 곳 마산, 내리는 곳 대전....?

생전 처음 보는 지명인 대전..... 그곳은 또 어떤 곳일까?

몇 시간 후, 대전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려 다시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삼십여분쯤 지나 어느 정류장 앞에서 내린다.

바로 앞 골목 안으로 몇 발자국 걸어 들어간 엄마는 낡은 건물 입구 앞에 멈춰 선다.

테두리와 아랫칸은 나무이고, 윗부분은 반투명한 모루 유리가 박힌 문 손잡이 위엔 하얀색  바탕의 길쭉한 플라스틱 팻말에 빨간색 글씨로 '당기시오'라고 쓰여 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간판엔 '은정 여관'이란다.

여관? 뭣 하는 곳일까?

엄마는 앞에 씐 대로 문 손잡이를 앞으로 잡아당겨 나를 데리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유리로 덧대어져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곳 너머엔 작은 방이 있고, 그 앞에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신다.

엄마는 유리벽 아래로 팔 하나 들어갈 만한 반원의 작은 구멍에 고개를 약간 숙이고는 익히 그래왔던 듯 "201호 열쇠 주이소"란다.  

열쇠를 받아 들고 2층 계단을 올라가니 시멘트 복도 바닥 양쪽으로 똑같이 생긴 나무 문 너덧 개가 주욱 일렬로 마주 보고 있다. 그중 가장 앞에 있는 나무문의 동그란 손잡이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오른쪽으로 살짝 돌리자 '달칵'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방문이 열린다.

신발장이랄 데도 없이 누구나 지나는 복도, 방문 앞에 신발을 벗고 아이에게는 다소 높은 턱을 올라 방으로 들어서니 주방도, 화장실도 없이 세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듯한 덩그러니 방 한 칸이다.

방 입구에서 쓱 훑어보니 방문 바로 앞, 오른쪽 벽면엔 위험천만하게도 조그마한 곤로가 있고, 맞은편 왼쪽 벽에는 가로 육십 센티쯤이나 될 듯한 보라색 천 캐비닛이 있다. 그 맞은편 벽 아래 방바닥엔 빨간색 바탕에 하얀색 벚꽃이 어지럽게 그려진 작고 길쭉한 철제 쟁반에 하얀색 스킨과 로션 병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앞으로 나와 엄마가 지낸다고?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집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이곳에서???'


'엄마는 그럼 지금까지 돈을 번다며 나를 이곳저곳에 맡겨놓더니 겨우 이런 곳에 날 데려 온 건가? 지금까지 뭘 하며 살았을까?'


여태껏 온갖 고생을 하며 여러 곳을 떠돌아다녀 눈치가 환해진 아이는 꽤나 실망한 마음이 얼굴 가득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엄마가 없어 곤욕을 치렀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엄마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다시 한번 상기하고는 잠시나마 실망스러웠던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방에 들어와 엄마는 나를 앉혀놓고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이전에 불리던 내 이름의 성씨는 황 씨였는데 이젠 엄마 성을 따라 박 씨 성을 사용하게 된다고 했다.

내가 장양경으로 불려지기 전, 후엔 어른들이 이름을 물으면 비록 호적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생부의 성씨인 황 씨 성을 붙여 이름을 말하곤 했었다.

나중에 엄마의 말을 듣자니 막상 아이를 낳았지만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엄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나를 떨어뜨려놓고 일을 하던 어느 날 엄마가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 밖 현수막에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자녀를 태어난 날짜에 정상적으로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한시적으로 특별 허가 한다'는 글을 스치며 보게 된 것이다.

그걸 보자 눈이 번쩍 뜨이는 듯 당장 동사무소에 달려가 확인을 고, 외삼촌을 호주로 세워 박 씨 성을 따르게 한 뒤, 출생 신고를 정상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고 다.

이 글을 쓰며 궁금해진 나는 초본을 떼어 자세히 살펴보니 1983년 12월 26일 날짜로 출생신고가 완료되어 있었고, 그날은 내가 북한땅이 빤히 보이는 강원도 철원의 민통선 안에서 크리스마스를 막 보낸 때였다.

아마도 그 무렵 외삼촌이 호주가 되어달라는 부탁도 할 겸 나를 찾으러 갔지만 내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때였나 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월 초쯤 내가 다시 엄마 친구 기도원으로 가서 어제 엄마를 만나게 되었고 오늘, 1984년 2월 22일 이곳 대전에 오게 된 것이다.


이미 취학통지서를 받았을 엄마의 마음은 바빴을 테다.

엄마는 그동안 어떤 인생을 거쳐오며 나고 자란 마산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 대전까지 와 있으며 얼마를 벌어 얼마나 모았기에 뜨내기들이 사는 여관에 아이를 데려와 살려는 것인지 궁금한 게 참 많았다.

입학식이 코 앞인 그날부터 엄마는 문구점에서 가방이며 공책, 필통 등을 사다 나르며 꽤나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검은색 접이식 도루코 칼로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에 정겨운 소리를 만들어 낸다. 연필이 속살을 드러낼수록 진한 나무향이 넓게 퍼지며 보잘것없는 이곳의 단조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다.


보라색 캐비닛 바로 아래 이부자리를 펴고 엄마와 딱 붙어 누웠다.

어둠 속에서 엄마와 도란도란 얘기하며 잠드는 이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저 즐겁고 설렌다기보다는 서글프기도, 가슴이 시리기도 한 이상한 감정이 뒤범벅이다.

엄마도 그랬을까? 어둠 속에서 나처럼 한참을 뒤척이던 엄마는 이제부터 잠들기 전 기도를 하고 잠자리에 들자고 했다.

딱히 종교가 있는 게 아니어서 어디에 누구에게 하는 기도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보다 절대적 능력을 가진 어떤 대상에게 우리의 안위와 안녕을 비는가 행위인가 보다.

이러한 행위라도 해야만 앞날에 대한 불안함, 다시금 홀로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 무거운 짐과 왠지 모를 헛헛함 등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위안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엄마가 어떤 대상에게 기도를 하는지 한 번도 물은 적은 없었다.

나는 그럼 누구에게 또는 어디에 기도를 하는 게 좋을까?

그래도 가장 익숙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게 그나마 나은 듯했다.

네 살 때 동네 언니들을 따라갔던 교회, 대구에서 세 가지 신을 믿으며 언니들과 다녔던 교회, 엄마 친구의 기도원에서 매일 서너 차례 예배를 드리며 엄마를 만날 수 있게 해 달라던 기억 때문이다.


꿈에도 염원하던 엄마를 만나면 그저 즐겁기만 할 줄 알았는데  왜 그렇지 않은 걸까?

잠시나마 아빠라는 존재가 있었던 기억이 그리운 걸까? 우리 방문 앞을 밤이고 새벽이고 수시로 지나는 뜨내기 이웃들의 낯선 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그전보다 철이 더 들어서일까?


어쨌든 천신만고 끝에 엄마를 만났고 며칠이면 엄마의 따뜻한 손을 잡고 나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서 학교에 간다....


엄마와 함께라는 것만 생각하자...

그리고 이젠 마냥 웃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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