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집

친구를 만나다

by 호두파이

단발머리 여고생 때, 친했던 친구 H를 근 40년 만에 만났다

하나도 안 변했다며 호들갑을 떠는 우리들을,

주위 사람들이 흘낏 쳐다보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한참을 여고시절 얘기를 하다 보니

잊었던 옛날이,

낚싯줄의 작은 고기들처럼 하나씩 끌어올려져 왔다


"너네 집,, 진짜 예뻤는데, 니네 집 갔다 오면

난 우중충한 우리 집에 돌아가는 게 싫었어ᆢ"

H가 꿈꾸듯 말했다


나는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날에 살았던 그 시절의 우리 집.

초록색 페인트로 칠 해진 대문을 열 들어가면

아버지가 정성스럽게 가꾸어 놓은 양잔디가 깔린 마당이 나오고,

그 마당 한 켠에는 채송화, 장미, 과꽃, 수국 등이

철 따라 예쁘게 피었다 지곤 했다


혈기왕성한 기자로서 힘든 시대를 온몸으로 막아 선

아버지는

너무 젊은 나이에 실업자가 되어서

온종일 마당을 오가며 꽃 가꾸는 일에만

시간을 보내셨다


집에 놀러 오는 이웃 사람들이나

내 친구들은

정갈하게 정리된 마당과 집을 보고

감탄에 가까운 칭찬을 했지만,

어린 나는

온종일 집에서 할 일 없이 보내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신학기 때, 가정환경조사서라는 종이를 받고

부모님 직업을 적어야 할 때면

무직이라고 적기 싫어서

(전) 언론인, 이렇게 적기도 하고

어떨 땐, 밭이 조금 있으니 농업? 이렇게 적기도 하면서도

아버지가 왜 기자를 그만둬야 했는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독재정권에서

기자로서의 양심을 팔지 않았던,

아버지의 대가는 너무 혹독했지만

철없는 당신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유능하기를 바랐고,

학비 걱정하지 않고, 학용품을 마음껏 살 수 있기를 바랐고

엄마와 함께 가던 극장 구경을 못 가게 된 것을 속상해했다


말없이 화초를 정리하는

구부정한 아버지 등 뒤로

때로는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가랑비가 내리기도 하고

살포시 낙엽 하나가 내려앉기도 했었다


친구 H의 부러움 속의 나의 옛날 집은

아버지의 긴 공백 속,

어쩌지 못하는 분노와 긴 기다림, 한숨과 우울이

빚어낸 예쁜 집이었다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에 눈이 내린다

하얀 눈을 밟으니,


사각사각사각,

이발하듯

잔디를 깎아나가던 아버지의 가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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