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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집
친구를 만나다
by
호두파이
Mar 17. 2022
단발머리 여고생 때, 친했던 친구 H를 근 40년 만에 만났다
하나도 안 변했다며 호들갑을 떠는 우리들을,
주위 사람들이 흘낏 쳐다보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한참을 여고시절 얘기를 하다 보니
잊었던 옛날이,
낚싯줄의 작은 고기들처럼 하나씩 끌어올려져 왔다
"너네 집,, 진짜 예뻤는데, 니네 집 갔다 오면
난 우중충한 우리 집에 돌아가는 게 싫었어ᆢ"
H가 꿈꾸듯 말했다
나는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날에 살았던 그 시절의 우리 집.
초록색 페인트로 칠 해진 대문을 열
고
들어가면
아버지가 정성스럽게 가꾸어 놓은 양잔디가 깔린 마당이 나오고,
그 마당 한 켠에는 채송화,
장미, 과꽃, 수국
등이
철 따라 예쁘게 피었다 지곤 했다
혈기왕성한 기자로서 힘든 시대를 온몸으로 막아 선
아버지는
너무 젊은 나이에 실업자가 되어서
온종일 마당을 오가며 꽃 가꾸는 일에만
시간을 보내셨다
집에 놀러 오는 이웃 사람들이나
내 친구들은
정갈하게 정리된 마당과 집을 보고
감탄에 가까운 칭찬을 했지만,
어린 나는
온종일 집에서 할 일 없이 보내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신학기 때, 가정환경조사서라는 종이를 받고
부모님 직업을 적어야 할 때면
무직이라고 적기 싫어서
(전) 언론인, 이렇게 적기도 하고
어떨 땐, 밭이 조금 있으니 농업? 이렇게 적기도 하면서도
아버지가 왜 기자를 그만둬야 했는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독재정권에서
기자로서의 양심을 팔지 않았던,
아버지의 대가는 너무 혹독했지만
철없는 당신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유능하기를 바랐고,
학비
걱정하지 않고, 학용품을
마음껏 살 수 있기를 바랐고
엄마와 함께 가던 극장 구경을 못 가게 된 것을 속상해했다
말없이 화초를 정리하는
구부정한 아버지 등 뒤로
때로는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가랑비가 내리기도 하고
살포시 낙엽 하나가 내려앉기도 했었다
친구 H의 부러움 속의 나의 옛날 집은
아버지의 긴 공백 속,
어쩌지 못하는 분노와 긴
기다림, 한숨과
우울이
빚어낸 예쁜 집이었다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에 눈이 내린다
하얀 눈을 밟으니,
사각사각사각,
이발하듯
잔디를 깎아나가던 아버지의 가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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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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